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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직장 4개에서 일을 해 봤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속도만은 빠른 편이었다. 뭔가 놓치는 실수를 한 적은 있어도, 너무 느리다는 말을 들은 적은 별로 없다. 첫 직장에서 어떤 선배가 "1시간 정도면 할 수 있지?"라며 맡겼던 일을 20분만에 해서 주니까 "뭐야? 20분만에 되면서 왜 1시간 걸린다고 했어?"라고 뭐라고 한 적도 있었다. (칭찬을 해 줘 그럴 때는...)
특히 전 직장 헤이조이스에서 함께 일했던 많은 유능한 동료들이 "어떻게 그렇게 일을 빨리 쳐내요?"라는 말을 자주 해줬다. 그 때 이게 강점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그러게. 나는 '어떻게' 일을 빨리 할 수 있는 거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해내는 작업을 문서로 정리해보면, 나름대로의 '스킬'이 된다. 실제로 '어떻게 하면 빨리 일 할 수 있는지' 노션으로 정리해서 인턴분들께 30분 내로 알려드렸다. 반응이 좋았고, 그대로 브런치에 올리면 되겠다는 감상이 많았다. 그래서 오늘 올려보기로 한다.
사실 대부분의 일처리가 빠른 사람들은 이와 비슷하거나 같은 프로세스를 갖고 있을 것 같다. 다른 프로세스도 궁금하다. 이런 거 다들 어디다가 공유하는지 모르겠네. 뭐 퍼블리, 미디엄 이런 데 많은가...?
일을 잘 한다는 건 뭘까. 여러가지 조건이 있지만, 우선순위를 잘 정하는 게 결정적일 때가 많더라.
일을 '빨리'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순서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항상 네 가지 종류로 나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
1단계 : 지금 해야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함
2단계 : 지금 해야 하는데 지금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다른 파트나 동료가 먼저 작업해서 나에게 줘야 하는 일은, 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3단계 : 지금 안 해도 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함. 그러다 2단계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2단계를 함
4단계 : 지금 안 해도 되고 지금 할 수도 없는 일은, 해야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아예 잊어버림
이러면 시간 로스 없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효율성을 높이고 싶다면 먼저 예측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하는 작업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절대 마감을 맞출 수 없다. 계획도 다 어그러지게 마련이다.
특히 위에서 말한 순서를 스무스하게 따라가려면 작업별로 걸리는 시간을 정확하게 아는 게 필수다. 왜냐하면 지금 할 수 없는데 지금 해야 하는 일을 기다리는 빈 시간 사이사이에, 지금 안 해도 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끼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옆 팀에서 넘겨 주면, 곧바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 A가 있다고 치자. 멍때리고 옆 팀만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 그 시간에 별로 급한 건 아니지만 나 혼자 처리 할 수 있는 일 B를 하면서 기다리면, 퇴근이 빨라진다.
그런데 B에 걸리는 시간을 제대로 예측을 못했다. B를 시작하긴 했는데 다 마무리 하지 못한 상황에서 옆 팀이 A를 넘겨줬다. 그럼 일단 우선순위에 따라 B를 놓고 A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 보면, 시작은 벌려 놓고 마무리가 안 된 일이 여러 개 발생한다. 결국 뭔가 많이 하긴 했는데 제대로 끝낸 일은 없는 하루가 된다. 최악의 비효율이다.
결국 효율적인 시간표를 짜려면 각 작업에 걸리는 시간을 예측하는 게 최고로 중요하다.
작업별로 걸리는 시간을 잘 알면, 그걸 바탕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의 마감시간을 정할 수 있다. 나는 그걸 항상 속으로 생각하면서 일한다.
예를 들면 매일 출근하자마자 슬랙에 다음과 같은 스크럼을 쓰는데, 그 옆에는 항상 투명글씨로 쓰여진 나만의 마감시간이 있다.
오늘 할 일
어제 했던 A 처리하기 (최우선순위. 지금부터 30분 안에 하기)
A를 B로 정리하기 (1시간 잡자. 오전 미팅 전에 끝내기)
동료의 작업 피드백하기 (1시간 잡자. 밥 먹고 2시까지 끝내기)
C 리서치하기 (급한 건 아니다. 오후 미팅 끝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자)
마감시간을 마음 속에 제대로 정하지 않으면, 중간중간 쉬거나 놀다가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이러면 야근한다. 쉬는 시간을 딱 정해놓는 뽀모도로 기법이 괜히 유행하는 게 아니다. 설렁설렁 쉬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끝내놓고 칼퇴하려면 작업별 마감시간은 필수다.
작업별 마감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에도 강하다. 내가 남의 일을 기다리듯이, 남도 나의 일처리를 기다릴 때가 많다. 이럴 때 "금방 돼요"라거나 "곧 드릴게요"라고 말하지 말고, "몇시 몇분에 드릴게요"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모두의 효율성이 올라간다. 나는 "그거 언제까지 돼요?"라고 물어봤을 때 "금방"이나 "곧"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항상 "그건 몇시 몇분을 뜻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이렇게 남한테 말해 놓으면 나 자신에게도 압력이 들어와서 집중력이 높아지고 딴짓을 못하게 된다.
오해하지 말자. '계획된 멍 때림'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일을 하다가 '아, 뇌가 과부하 되고 있다. 10분만 멍 때리자.'라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게 좋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작업 사이 사이에 내가 멍 때리는지도 모르게 멍하니 있기가 생각보다 쉽다. 일 하나를 마쳤는데 다른 하나를 시작하지 않거나, 미팅과 미팅 사이거나, 남이 해 줘야 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거나 등등. 그럴 때는 쉬려면 쉬고, 일하려면 일하는 게 낫다.
비는 시간이 얼마냐에 따라, 작업별로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끼워 넣기 적절한 작업을 선정하면 좋다. 지금 안 해도 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이면 좋다.
너무 짧아서 뭘 하기가 애매한 시간이라면? 나는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한다.
쉰다. 그냥 푹 쉰다. 소파에 가서 누워 있거나 간식을 털거나 그 시간에 맞는 노래를 듣거나 영상을 본다.
아무리 짧은 텀이라도 머리는 굴릴 수 있다. 종이 하나 펴 놓고 마인드맵을 한다. 발상, 아이디어, 리서치...
아무리 짧은 텀이라도 기계적인 일은 할 수 있다. 공유 폴더 정리, 파일 정리, 오타 찾기...
고등학생 때부터 토익, 토플, HSK, JLPT 같은 어학시험까지, 나는 어떤 시험을 봐도 시간이 모자란 적은 별로 없었다. (아예 몰라서 문제를 못 푸는 경우는 많지만...) 이건 정확히 비결이 있다. 고등학생 때 아빠가 수학 문제 빨리 푸는 비법을 전수해줬다. (아빠는 카이스트 수학 석사다...)
먼저 문제를 읽을 때, 시험지에 글자를 쓰기 전에 머릿속에서 설계를 해라. 이건 이런 뜻이겠구나, 이런 방향으로 풀어보면 되겠구나. 한 번 머리로 네가 갈 길을 그려 봐라. 그 다음에 실제로 숫자를 쓰면서 적용해 봐라.
나: 왜 그렇게 해야 돼? 바로 손으로 쓰는 게 빠르지 않아?
아빠: 아니야. 인간의 뇌가 뉴런을 통해 작동하는 방식은 전기신경자극이잖아. 너는 머릿속에서 천천히 생각한다고 느끼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돼. 뇌는 무조건 손보다 빨라.
아빠 말이 맞았다. 뇌는 손보다 빠르다. 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생각 단계에서 최대한 디벨롭하고 손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무조건 효율적이다.
글을 쓸 때도 머릿속에서 최대한 디벨롭한다. 컨셉, 톤앤매너, 글 구조, 이야기 흐름, 꼭 들어가야 하는 중요한 팩트... 그 다음에 적어서 정리한다. 첫번째 문장도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후보를 많이 띄워보고 그 중 제일 괜찮은 걸 실제로 적는다. 이게 결과적으로는 제일 빠르다. 생각하다, 글쓰다, 생각하다, 글쓰다 하면 시간 오래 걸린다. 생각 단계에서 최대한 완성시켜 놓고 타자를 치기 시작하는 게 효율적이다. 무조건 생각이 타자보다 만배 빠르다.
발상(머리) ☞ 쓰기(손) ☞ 검토(머리) ☞ 수정(손)
또는 심지어
발상(머리) ☞ 검토(머리) ☞ 쓰기(손)
이렇게 한 단계 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발상 후 검토까지 하려면 훈련이 많이 필요하다.
머릿속에서는 이런 것까지 빠르게 고려할 수 있다.
이 각도, 저 각도, 머릿속에서 여러 아이디어의 각을 재보고 검토해 본다
다른 사람이 피드백 할 것 같은 부분을 미리 고려할 수 있다. 내가 예상한 피드백이 나왔을 때, 그 생각을 했는데 왜 이렇게 했는지 설득할 수 있다. 피드백은 기본적으로 예상치 못한 점이어야 하고, 애초에 내 머리로 충분히 피드백 했다면 피드백 받을 부분이 거의 없다.
내가 맡은 일 중에는 생각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작업도 있다. 데이터 라벨링에 가까운 일이나, 이미지 또는 영상을 간단히 편집하는 작업들.
이런 경우 중간에 방해 받지 않을수록, 작업이 끊기지 않을수록 빨리 끝난다. 무조건 통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 5분 하고 딴짓하고, 5분 하고 딴짓하면, 10분짜리 작업에 30분이 걸린다. 그런데 딴짓 1도 안하고 주르륵 하면 넉넉히 15분만에 끝난다. 지하철이 가다가 중간에 딱 한 번 1분 연착해도 10정류장 후에는 10분 연착이 되는 것처럼, 잠깐 쉬어도 총 작업시간에 엄청난 연체가 생긴다.
대부분의 경우, 기억력이 좋으면 시간이 절약된다. 당연하다. 실제 정보를 확인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시간이 훨씬 빠르니까.
다행히 기억력은 훈련할 수 있다. 평소에 사소한 것을 기억하는 습관을 들이면 훨씬 나아진다. 뭔가 아리까리할 때 일단 기억에 의존해서 해 보고, 맞는지 확인한다. 물론 이 때 확인하는 작업이 필수다. 무턱대고 내 기억력을 믿었다가 크게 실수 하거나 거대한 비효율로 돌아올 수 있다.
자주 하는 실수나 버릇을 기억할 때까지 포스트잇에 써서 모니터에 붙여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교정교열에 자주 걸리는 표현, 자주 쓰는 비문)
모든 작업은 머리로 작성하고, 손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