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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Jan 02. 2021

한 해를 정리해 볼까요

정리하기도 전에 새해가 와버렸어요

2020년이 끝났다. 이미 끝나버렸다. 12월 내내 놀랍도록 지루하고 싱겁지만 즐거운 연말을 보내기 위해 애쓰면서 나름의 연말 결산을 해 보기 위한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월별로 하나씩 나만의 빅 이벤트를 꼽아본다던지, 항목별로 올해의 ㅇㅇㅇ라는 상을 스스로에게 줘 본다던지. 그런데 12월을 연말 답지도 않게 지루하고 조용하게 보내며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도 별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시시하게 보낸 것이 아쉬워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사실 일 년을 정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 해를 정리하려면 일 년을 단위로 묶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간은 연속선상에서 늘 흘러가는 것이고 일 년 단위의 시간을 정리하려면 연속 변수인 시간을 범주형 변수로 먼저 변환해야 한다. 문득 시간을 한 달, 일 년 단위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시기를 콤마로 구분해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새로운 출발점을 찍어보는 것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2020년은 정리하기엔 너무 많은 일들과 감정들로 꽉 차 있었던 한 해이기도 했다. 강박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내가 작년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쉽고 끝내기엔 이룬 것이 없다고 여겨서였다. 물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가 계획했던 절차를 밟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느낀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보통 일 년에 서너 가지 정도의 굵직한 목표를 잡는데 작년에는 거의 다 이뤘다고 생각한다. 과정적으로도,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완벽했다. 그런데 계속되는 취소와 연기, 좌절로 인해 내가 세운 목표와는 별개로 김빠진 나날들을 너무 오래 보냈다. 그럼에도 어려운 시기였던 만큼 더 잘하고 싶었고, 더 깔끔하게 갈무리하고 싶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서툴고 모자란 결과이더라도 용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 시기를 누구보다 잘 보내고 싶기도 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나도 그냥 딱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잘 버텨오던 남들만큼 노력했고 실패했으며 버텨왔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자신에게서 빚을 내어 현재를 버티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현재의 내가 얼마간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안전기지를 만들어서 동력이 없어진 미래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현재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의 간절함은 조금 성격이 달랐는데,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시기였다. 어쩌면 나는 간절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겨난 간절함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쓰려했다. 그러나 평생 쓸 수 있는 간절함, 절실함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그걸 젊은 나이에 몰아서 미리 다 써버리고 있는 거라면? 사람이 평생 간절함을 품고 두근대며 살아갈 수는 없다. 간절함이 끝내 해소되지 못한다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려는 자세는 사람이 한계 없이 성장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그 사람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설레는 감정과 불안의 심장박동 소리는 같고 그건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저 그 울림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이다. 간절함이라는 이름의 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 이름표는 언젠가 다 타버릴 것이다. 젊은 날 간절함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자가 시간이 지난 뒤에 까맣게 타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미 중년의 나이를 지난 뒤에 내 서랍 속엔 더 이상 깨끗한 상자가 몇 개 없을지 모른다. 그러면 이후의 남은 날들은 무얼 꺼내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머뭇거리다가 2020년이 끝났고 새해가 시작됐다. 그리고 대망의 1월 1일도 평범하고 별 볼 일 없이 지나갔고 아무것도 아닌 1월 2일이 왔다. 나는 12월을 좋아한다. 생일도 있고 일 년간 달려온 모든 게 마무리되는 시기이고 그것이 잘 됐건 잘 안 됐건 축하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옷을 입고 여기저기서 감사와 축복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한 해의 대부분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1월 2일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보통의 날인 1월 2일 새벽은 긴긴 낮잠과 늦은 시간에 오랜만에 마신 커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보내는 중이다.  올 한 해도 이런 그저 그런 날들이 모여서 완성될 것이고 그때쯤 되면 내 손 안에는 또 어떤 상자 하나가 들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 년 내내 어떤 상자들을 다 태워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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