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에 대해 생각해 보다
"기록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기록 고민이 가득했는데 보고 난 후에도 여전해서 기록을 해본다.
미닝 크리에이터(의미부여맨)인 나는 202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여행과 나날’(旅と日々·Two Seasons, Two Strangers))를 조조로 봤다. 춥다 못해 청명한 날이었다. 아이도 어린이집을 가고 아내도 출근하는 날, 그리고 나만 쉬는 날이었다. 연말연시를 가족과 진하게 보낸 뒤였다. 오랜만에 혼자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시청에서 덕수궁 옆길을 따라 정동길을 거슬러 걸어 올라갔다. 축지법도사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 영화의 설정이 재미있다. 다다미 방의 수많은 미닫이 문들처럼 레이어가 그득하다.
일단 액자식 구성으로 시작한다. 함축적인 메타포를 담은 단편영화를 먼저 보여준다. 그 단편의 극본을 쓴 ‘이 씨‘(심은경 역)가 전체 영화(여행과 나날)의 주인공이다. 단편영화의 장면이 줌 아웃되고, 그 영화의 대담회 현장에 있는 주인공이 다시 출연을 하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액자식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李)씨‘는 일본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한국인이다. 즉 이방인으로서 그녀는 독백한다. 그에게 일본은 처음엔 여행지와 같았다고 한다. 두려움에 머뭇거리기도 했고 새로워서 재미있기도 했다. 순간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그 여행은 이내 일상이 되었다. 익숙해졌다. 자신의 생각으로 상황이 해석되기 시작했다. 생각이 다발적으로 떠오르고 그것들을 모두 잡아두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점점 말들에 갇히게 된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마음이 다다미방처럼 된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면 여행이 아닌가. 잠시 머무는 개념이니까" 내지는
"사실 일상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가장 먼 것이 인생이다. 잡을 수 없다. 끝이 있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기록에 대해 조명을 한다.
왜 우리는 생각들을 붙잡아두고 싶을까. 왜 일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록해 대는 것일까. 지금 이걸 써 놓는 나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꽤나 기록에나 집착하는 편이었다.
예전에 한 작가님께 기록들을 효과적으로 아카이빙 하는 방법에 대해 우둔이 물은 적도 있다.
'나도 넘치는 메모가 감당이 안된다. 내가 고안한 이런저런 방법이 있어서 보여줄 순 있다만, 결국 너한테 맞는 방법은 따로 있어'라는 답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나는 내 기록보관소센터를 구축했을까. 어림없었다. 머릿속의 서랍만 짝 안 맞는 양말들이 가득한 모양처럼 더 복잡해져만 갔다. 한 마디로 기록에 지치기도 했던 요즘이었다.
고민을 듣던 아내(우리 집 구루)가 말했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즐겁게 살아보자"
나루호도. 역시 여행처럼 사는 것이 답인가. 그런데 그건 너무 또 허무하잖아.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여행과 나날]의 감독이자 극본가인 미야케 쇼(三宅唱·41)도 비슷한 고민이 있어 보인다.
기록은 어쩌면 인생을 여행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미련 같은 것이라 늘 번거로움을 수반하긴 한다만, 그럼에도 그는 일단은 영화라는 자신만의 기록법으로 무언가를 써보기로 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꼽은 이 영화의 핵심 씬은 두 개다.
여관 주인과 '이 씨'의 대화, 메타포 영화에 대한 한 학생의 질문과 감독의 답변
(내 생각이 오버랩된 기억이라 디테일한 대사는 왜곡이 있을 수 있다)
1. 여관 주인과 '이 씨'의 대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것 같은, 아니 메이지 시대 사극에 나올 것 같은 아저씨가 한 말이다.
'이 씨'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얘기했다.
"인간의 슬픔을 결국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기쁨도 노함도 즐거움도 아니다. 오직 슬픔.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독과 슬픔. 그걸 얘기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다 갑자기 티브이라는 문명을 모르는 것 같은 그 양반이 (아마도) 굉장히 유명한 개그쇼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웃겨도 된다. 그게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개그쇼는 재미가 없다"
갑자기 이런 의외성 있는 대사를 치길래 보는 나도 어이가 없어서 정신이 잠깐 방을 나갔다 들어오기도 했다. 감독의 현혹술이다. 메시지에 쉽게 접근하는 걸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대화는 두 번째 핵심 씬과 궤를 같이 한다.
2. 한 학생의 질문과 (극 중) 감독의 답변
일단 이 질문을 흑인 유학생이 유창한 일본어로 내뱉는다. 그 이질감에 미혹되어 또 놓칠뻔했다. 정말이지 감독이 지극정성을 다해 감추려고 한다. 너무 소중한 메시지이니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길 바라는 마음이려나, 꼭 다다미방 같다.
학생이 묻는다.
"감독 지망생이다. 나는 인간의 고독함을 표현하고 싶다. 조언을 줄 수 있겠느냐"
감독이 답한다.
"고독함을 표현하는 것은 의미 없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는 순수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창작자라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자기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함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일으켜야 한다."
순수함. 너무 순수해서 슬플 정도로 순수함. 때로는 얼음 같은 분노가 되기도, 불타오른 열정이 되기도 하는 한 인간의 순간적이고 솔직한 결정체. 오직 자신만의 경험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한 박제는 과연 의미 있는 작업인가. 나아가서는 글이든 그림이든 어떤 형태로 누군가에게 보이는 건 과연 어디까지 순수할 수 있는가. 그 불완전성이 예술을 정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관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래서 인간은 슬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로 달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밀알만큼이라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기록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 보는 사람이 순수성을 완성시킬 것이라 믿는 수밖에.
“그렇다면 기록을 계속해야 되겠네?”
아직까지 확신이 안 서는 질문이 계속되는 사람을 위해 미야케 쇼 감독은 츤데레처럼 힌트를 준다. 카메라다.
주인공 ‘이 씨’는 멘토였던 한 영화 평론가의 유품이었던 카메라를 받는다. (재밌는 건 이 분이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평론이 “관능미가 있다”라는 멘트였다. 기록광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장 현재를 여행처럼 살다 갔다) 일상, 여행, 그리고 기록에 대한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던 ‘이 씨’였기에 손사래를 쳤다만 어쩔 수 없이 손안에 들인다. 그 카메라를 들고 떠난 여행. 여행을 일상처럼 남기고 싶어 종종 셔터를 누르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카메라의 존재를 잊곤 한다. 급기야 가장 여행 같은 순간에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괜히 가져갔다가 곤욕을 치른 것이다. 감독은 ‘이 씨’와 ‘카메라’를 통해서 기록에 엮인 우리의 숙명을 보여준다. ‘이 씨’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걷고 또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하다 보니 영화의 풍경처럼 내 머릿 속도 조금은 맑아졌다. 역시 기록을 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