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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니발 Jul 28. 2024

<케빈에 대하여>(2011) 리뷰

사랑받기 위해,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걸 없앴다.

    에바는 언제나 분리되고 싶어 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직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바의 본성은 정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결핍을 바깥세상에서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몸 안에 케빈을 임신했을 때 에바가 가진 감정은 절망과 후회였을 것이다. 이는 모성애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행복이 모두 빼앗긴 것 같은 그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 아이는 연결되어있기에 케빈도 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케빈은 잉태된 그 순간부터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에바는 케빈을 낳는 그 순간마저도 현실에 저항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바가 출산하는 장면에서 의사는 "Stop Resisting"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은 에바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집요할 정도로 에바를 괴롭히는 케빈

 

    이와 반대로 케빈은 언제나 엄마와 붙어있고 싶은 아이다. 그의 주변을 둘러보면 결핍이라고 할 것이 많지 않다. 케인의 집안은 유복한 집안이고 아버지는 케빈에게 다정하다. 겉으로 보았을 때 모자랄 것 없는 환경이다.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케빈은 언어 능력이 미숙했을 때도 본능적으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케빈은 똑똑한 아이였기에 어떻게 하면 엄마가 자신에게 붙어있을 수 있을지 알았다. 바로 미숙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설사 그 행동이 엄마를 괴롭히더라도 악의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엄마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엄마를 곁에 남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선하면서 미숙한 행동을 하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케빈은 엄마의 사랑을 원하면서도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일갈하듯이 자신의 분노를 엄마에게 쏟아낸 것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난 더 행복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면서 자신을 낳았다는 분노가 에바와 아버지 프랭클린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예전에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그렇다면 왜 케빈은 엄마를 왜 죽이지 않고 다른 무고한 사람을 죽였을까? 이는 목표 지향적인 케빈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잘 보여준다. 케빈이 어릴 적부터 부족했던 것은 단 하나, 엄마의 사랑이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는 분리불안을 해결하는 것, 이것이 열여섯 케빈의 평생 목표였다. 엄마를 너무 미워했기에 엄마를 죽일 수 없었고, 여태껏 미숙한 행동을 통해 엄마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한 것처럼 케빈은 인간으로서 미숙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어머니에게 ‘살인마의 엄마’라는 낙인을 씌우면서 평생을 고통받게 하는 괴롭힘을 주면서도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에바는 모성애가 부족하지만, 책임감은 강한 여성이었기에 케빈도 에바가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케빈은 16살이 되기 전 살인을 저질렀고 2년이 흐른 후 성인이 되는 미래를 앞두고 있다. 이 순간에 에바는 케빈에게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물어본다. 케빈의 대답은 "예전에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이다. 개인적으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영화 <고지전>이 떠올랐다. 류승룡이 분했던 북한군 장교는 전쟁 초반에는 싸우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케빈 또한 자신의 생의 초반에 모든 목표는 엄마였지만, 이제 어린이의 모습을 벗고 어른으로서, 하나의 주체로서의 인생을 맞이하는 순간, 그 평생의 숙원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쾌락에서 비극으로 바뀌는 한 순간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토마토 축제 시퀀스는 영화의 전체 상황을 잘 표현해준다. 처음에 관객은 에바가 흥에 겨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다. 인상적인 것은 린 램지 감독이 이 즐거움을 공포로 바꾸는 방법이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짙게 깔리는 이 신에서 갑자기 음산한 음악과 함께 "네년이 내 애를 앗아갔어."와 같은 섬뜩한 대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영화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게 된다. 축제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듯한 토마토 덩어리들이 마치 시체의 살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에바는 그 살점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더 나아가, 토마토 축제 장면이 끝난 후 곧바로 에바가 테러를 당하는 장면이 붙는다. 토마토와 같은 붉은 색으로 페인트 테러를 당한 에바는 절망한다. 하룻밤의 쾌락이 공포로 넘어가면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붉은 토마토를 뒤로 한채 에바가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영화 속 작은 디테일도 이 영화를 촘촘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스프링클러는 영화의 종반부에서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끔찍한 장면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준다. 이때 재밌는 것이 케빈이 어릴 적 에바의 여행 방을 엉망으로 만드는 순간인데, 케빈은 물총으로 에바의 방을 망가뜨려 놓지만, 그 순간 어울리지 않게 스프링클러 소리가 들어간다. 이는 에바가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하여 케빈이 에바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에바가 붉은 페인트를 없앨 때 기계를 이용하는 장면도 재밌다. 그 순간 이웃집 남자는 전동 잔디깎이를 사용하여 정원을 관리하는데, 비슷한 기계를 사용함에도 완전히 다른 붉은색과 초록색, 생명과 죽음이라는 대비가 어우러진다. 이렇듯 린 램지 감독은 디테일한 연출을 통해 에바와 케빈의 관계성과 비극의 아이러니함을 유려하면서 섬뜩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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