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망하지 않았고 주짓수 파란띠가 되었다.
#1. 어쩌다 보니 오래전에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당시에 쓴 글이 기억나서 링크(https://brunch.co.kr/@honux77/3)를 열어 보니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대박나진 않았지만 망하지도 않았다. 공동창업자 세 명 모두 그대로 남아 월급을 받으면서 살고 있고, 주니어 개발자 2명과 교육과정을 관리하는 매니저도 한 명 생겼다.
#2. 입사 당시 $300 이던 전 직장의 주식은 이제 $3000이 되었다. RSU라고 해서 입사할 때 4년을 채우면 받을 수 있는 주식이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살짝 마음이 아프다. 더불어 살인적인 업무로 유명한 전 회사에 잘 적응하고 생존해서 RSU를 수령한 입사동기들이 대견하고 부럽다.
#3. 창업과 동시에 주짓수를 시작했다. 이것도 우연한 계기에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제자 J가 집 근처 주짓수 체육관을 방문한다고 소식을 전했는데, 문득 이대로 운동 안 하면 곧 죽을 꺼라는 의사의 협박이 생각나 나도 주짓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주짓수도 계속하고 있다. 소질이 없어서 실력은 잘 늘지 않고 부상도 자주 당하지만 건강검진 받으면 꽤 정상적인 수치가 나오는 몸이 되었다.
#4. 시작은 꽤 춥고 힘들었다. 몇 달 동안 사무실도 없고 월급도 없이 살았는데, 다행히 카카오 계열 VC인 K CUBE 벤처스의 투자를 받고 코딩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첫 해의 수익은 별로 없었거나, 약간 적자였던 것 같다.
#5. 우리는 외부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마케팅을 할 만한 컨텐츠가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초 기대와는 달리 회사의 주요 수익은 취업용 코딩 교육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고객이 원하는 방향이 그것이었다. 고객들이 우리 회사를 택하는 이유가 퀄리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교육 퀄리티를 높이기에 집중했다. 입소문을 타고 수강생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고, 기업 교육의 수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카오, 네이버 커넥트 재단, 우아한 형제들의 교육을 하게 된 게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적접적으로 감사 인사를 한 적이 없었는데 김범수 의장님, 김범준 대표님, 그리고 함께 일하는 많은 분들 모두 감사하다.
#6. VC에는 같은 시기에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모임이 있다고 한다. 이제 투자 동기 스타트업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우리는 정말 다행히 망하지 않았다. 왜 망하지 않았을까? 2020년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올해의 핵심 키워드 중에 "코딩 배우기" 와 "python" 이 있었다고 한다. 트렌드에 맞는 일을 해서 우연히 살아남은 걸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여튼 살아남아서 다행히다. 친한 스타트업 그로스해킹 전문가 형님은 우리 회사가 참 신기하다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하하하.
#7. 누군가 창업이 참 쉽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맞다. 창업은 참 쉽다. 그리고 망하는 건 더욱 쉽다. 회사 다니기 싫으면 창업을 해 보자. 금새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도 여전히 그만두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내 회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8. 국내 IT 서비스 기업의 대표 컨퍼런스들 - Deview, If-Kakao - 에서 발표를 하는 제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Amazon, Facebook, Google 같은 곳으로 취업한 제자들도 하나 둘 씩 생겨나고 있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다. 문득 우리도 미래에 코딩 아카데미 같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발자가 많이 부족하다던데 조금 더 규모를 확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더불어 든다.
2020년의 재미없는 회고는 여기까지 써야겠다. 우리 회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잘 모르니까 재미있는 인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