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경삼림>에 대하여
스포일러 주의
‘범법 행위를 진짜 예쁘게 포장했네’. 영화 <중경삼림>을 처음 접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극찬을 보고 부풀었던 나의 기대는 마약 밀매, 불법 침입, 수면제 등의 예상치 못한 것들로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실망감은 곧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다. ‘유례없이 아름다운 영화의 미술과 음악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런 건방지기 짝이 없는 평가는 곧 영화에 대한 더 이상의 의문을 차단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중경삼림>은 나의 머릿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는 희석되기는커녕 마음속 깊숙이 각인되어갔고, 종전에는 영화 포스터를 집안 벽면에 붙이고 영화 촬영지 방문을 위해 홍콩으로 여행까지 가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영화에 나온 여러 잘못된 행위들은 절대로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의 이러한 비도덕성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감성과 이성의 괴리가 만들어낸 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결국, 나는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경찰 번호 223번을 가진 형사 하지무(금성무)는 여자친구의 이별통보를 믿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처음으로 클럽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대시하겠다는 하지무의 앞에 금발 가발의 여인(임청하)이 등장한다. 비도 오지 않는 한 밤 중에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를 끼고 온 여성에게 하지무는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또 다른 경찰 633(양조위) 역시 이제 막 이별하였다. 집안의 가구들을 붙잡고 슬퍼하던 그의 일상은 단골 가게의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 페이(왕페이)를 만난 이후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중경삼림>의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2쌍의 남녀는 모두 이제 막 이별하고 괴로워하는 남성과 그 남성이 우연히 마주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우연히 마주한 인연은 벌어진 이별의 상처에 스며들어 그 상처를 보듬어준다. <중경삼림> 이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복잡한 도심 속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 인연에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그 지나간 인연들과 다가오는 새로운 사람과의 장면들 모두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했노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무와 금발 여인은 얼핏 보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그들이 하는 일부터가 그렇다. 남자는 범죄자를 쫓는 경찰인데 비해 여자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마약 밀수출 업자이다. 사랑보다는 쫓고 쫓기는 관계가 좀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만남이 딱히 운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하지무가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무작위 대상에게 대시를 했을 뿐이고, 마침 그 시간 그 장소에 금발 여인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만남에서는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우며, 혹자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존재 의의 자체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간절히 원하던걸 주었다. 금발 여인은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비옷을 입고 다니고 언제 날씨가 화창해질지 몰라 동시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마약을 가지고 있던 인도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지 몰라 경계하며 도망 다닌다. 그녀의 감정 상태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신’이 될 것이다. 그녀는 날씨부터 사람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믿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잠시라도 불안하지 않은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무는 어떠한 걱정, 불안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는 하룻밤을 그녀에게 주었다.
반면, 하지무는 메이와 이별 후 사랑이라는 감정과 기억의 휘발성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유통기한이 끝나면 잊히는 사랑에 슬퍼했고, 그 사랑의 기한을 만년으로 늘리고 싶어 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기억이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술에 취해 하루 종일 옆에서 잠만 잤던 신비로운 금발 여인은 그의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메이에 대한 미련은 마침내 땀과 함께 증발했고, 그 위로는 새로운 사랑이 퍼부어 내렸다.
이렇듯 하지무와 금발 여인의 이야기에는 ‘결여를 채우는 사랑’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같은 의미의 메타포가 두 번째 에피소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페이가 경찰 633의 집에 무단 침입하고 수면제를 탄 일은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었기에 행해진 일이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녀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범법 행위에 불과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녀는 그의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경찰 633의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주 공간이 아닌 그의 내면을 대변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항상 제복을 입고 같은 장소를 순찰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 변화를 보기 어렵다. 심지어 사귀던 승무원과 헤어진 후에도 그 무감각한 표정에서는 슬픔을 찾기가 어렵다. 대신 그의 감정은 그의 집과 집안의 사물들이 대변한다. 자신감이 떨어져 야위어 가는 비누, 슬피 우는 행주, 분노로 입을 다물어버린 인형, 외로움에 떠는 젖은 옷, 바닥이 물에 잠길 때까지 눈물 흘리는 집까지. 모두 이별에 슬퍼하는 그의 감정을 대신하여 표출한다. 경찰 633의 모든 감정과 결여는 외부에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페이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전 승무원 여자친구와 같이, 그의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페이가 그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여러 물건들을 자신이 원하는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집에 불법으로 침입한 소름 돋는 스토킹 행각이 아니다. 이별로 슬퍼하는 그의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어 그의 감정을 하나씩 바꾸어놓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중간중간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OST 인 ‘California Dreamin’’, 페이가 경찰의 집에 몰래 들어갔을 때 나오는 OST ‘몽중인(夢中人)’ (이 노래를 직접 부른 주인공 왕페이는 배우이기 이전에 중화권을 대표하는 국민 가수이다), 마지막으로 작중 페이의 대사, 이 세 가지에는 공통 키워드가 등장한다. 바로 ‘꿈’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맘대로 물건들을 바꾸는 페이의 행동이나, 매일같이 퇴근 후 집안의 물건들을 붙잡고 대화를 하지만 정작 바뀐 물건들은 한참 동안 눈치채질 못하는 경찰 633의 행동 모두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도저히 현실성이 떨어지는 여러 사건들이나 몽환적인 느낌 가득한 화면과 음악까지, 잘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꿈이라는 뉘앙스로 가득하다.
꿈이라는 시공간에서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모든 경험과 감정이 은유로 재현된다. 그렇다면 은유로 가득한 두 번째 에피소드의 텍스트를 단순히 ‘사실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해석해야 할까? 그렇게 하기엔 서사에 구멍이 너무 많아진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은 어떨까 ‘경찰 633과 페이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마치 꿈과 같았고,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은유로 가득 찬 그 꿈의 세계를 엿본 것이다’.
이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메타포로 가득한 꿈의 세계에서 엄격한 도덕/윤리적 잣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 잣대를 들이미는 것 자체가 맞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영화 <스토커>에 대해 이러한 평론을 남겼다. “이 영화의 기초가 되는 은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영화의 비도덕성에 논리가 결여돼 있다는 주장에도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논리가 없다. 왜냐하면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호르몬그래피, 씨네 21’). <중경삼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의 나오는 사물과 인물의 언행은 ‘사랑’에 대한 은유일 뿐, 현실성도, 준법정신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 한순간도 범죄를 미화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감정을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메타포로 표현했을 뿐이다.
오늘날 수많은 영화가 작품, 예술, 은유, 비판 등의 단어를 무기 삼아 대상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 내에 여러 폭력적인 표현들을 단순히 ‘은유일 뿐이야’라고 포장하는 것은, 섣부른 평가를 넘어서 관객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은유이고 어디서부터가 폭력일까. 나는 그 선을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꿈만 같았던 경찰 633과 페이의 사랑은 꿈에서 깨어난 그 순간 바로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겁게만 살고 싶다던 페이는 1년간 그의 곁을 떠나 자신의 꿈을 좇았고, 반대로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시끄러운 음악을 듣는다는 페이의 말을 의아하게 여겼던 경찰 633은 제복을 벗고 가게의 사장이 되어 되려 시끄러운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둘은 꿈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그러니까 꿈처럼 느껴졌던 서로에 대한 감정에 확신을 갖고 책임을 지기 위해,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영화의 은유가 그저 범법 행위가 아닌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