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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Oct 01. 2021

우리들이 살고 있는 데스게임

드라마 <오징어 게임> (Squid Game, 2021) 에 대하여

* 제가 작성하는 모든 글에는 다루는 작품에 대한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중학생 시절 처음으로 미드라는 신세계를 접한 이후로 앉은자리에서 밤을 새가며 드라마 시즌 하나를 통째로 다 보곤 했었다. 하지만 취향이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체력이 부족해진 건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드라마 1개 시즌은 커녕 드라마 보기를 시작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나에게 있어 최근 <D.P.>와 <오징어 게임> 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정말 오랜만에 밤을 새워서 몰아 보게 만드는 반가운 작품이었다. 특히 오징어게임은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받은 관심만큼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신이 말하는 대로>, <배틀로얄>, <퍼즐>


오징어게임이 주로 비판받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기존 데스게임 장르 작품과의 비교.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기존 데스게임 장르의 작품에서는 굉장히 신박하고 폭력적인 게임들이 등장하고 이를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하여 해결해가는 구성이 주를 이룬다. 내가 본 이러한 장르의 작품은 <신이 말하는 대로>, <배틀로얄>, <퍼즐> 등이 있다. 일본은 이런 장르에서의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와 잔혹성 표현은 타국의 작품에서는 이미 따라 하기 조차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있다. 하지만, 오그라드는 대사, 산으로 가는 이야기, 한없이 가볍기만 한 주제의식은 장점을 충분히 잡아먹고도 남을 정도로 큰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징어게임에서 주는 장르적 쾌감은 동일 장르의 기존 일본 작품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상급 진행요원 인원 파악은 안 하는 건가...?


개연성 부분도 비판받는 지점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평범한 경찰로밖에 보이지 않던 황준호 형사 (위하준 배우)가 오징어게임 잠입과 동시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인다던지 (사실 황준호 형사를 둘러싼 서사의 개연성이 대부분 매우 부실하다), VIP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VIP들 중 한 명이 게임 중간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지나 조치도 없고, 남은 VIP들 역시 전혀 동요하지 않는 부분 등 서사의 꽤 많은 부분에 빈틈이 보인다. 영화가 아닌 훨씬 더 많은 러닝타임을 가진 드라마라는 지점에서 개연성 부족은 더 많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연기력, 대사, 신파, 여성 혐오 등 다양한 부분에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논란이 되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고 같이 비판하거나 반대로 해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오징어게임이 재현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본래 무언가를 두고 경쟁하는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하게 보일 수밖에 없지만, 오징어게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 사회를 세밀하게 은유하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오징어게임이 말하는 평등

오징어게임의 일부 진행 요원들은 몰래 탈락자들의 시체를 빼돌려 장기밀매를 시도한다. 진행 요원은 참가자들 중 의사인 111번과 접촉해 장기 적출을 시키고 그 대가로 게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유출한다. 게임의 총책임자인 프론트맨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장기밀매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며 이렇게 말한다.


평등을 부르짖는 프론트맨


... 하지만 너희들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망쳐 놨어. 평등이야. 이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너희들이 그 원칙을 깼어.


프론트맨이 단호하게 말했듯이 얼핏 보면 오징어게임은 평등해 보인다. 참가자들이 게임 참가 이전에 어디서 무얼 했던 게임 안에서는 그저 참가번호 001 ~ 456번 중 하나에 불과하며, 게임에서 승리하면 어떠한 조건도 없이 거액의 상금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징어게임은 정말 평등할까? 이에 대한 정답은 명백히 '아니요'이다. 참가자들이 가진 조건이 전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대부분 유리한 게임 구조

- 한국의 전통 놀이들로 구성된 게임들과 이에 무지한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심지어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지역별로 규칙이 다를 수도 있음)

- 게임 사이마다 발생하는 폭력 사태 역시 게임으로 간주 (역시 신체적 능력이 절대적 우위를 점함)

- 순전히 운으로 승리해야 하는 설탕 뽑기 (설탕 녹이는걸 몰래 염탐하는 부분까지 주최 측에서 게임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음)

- 특정 사전 지식을 통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게임이 존재 ex) 징검다리 게임, 방탄유리와 일반 유리의 구분법


'확률상 남자들이 유리한 게임이 더 많아'


나열한 것 외에도 오징어게임에는 불평등이라고 느낄 수 있을만한 요소가 한가득이다. 그렇다면 프론트맨의 대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이에 대한 심판은 무엇일까? 그저 서사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대사에 불과한 걸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프론트맨은 분명 그 무엇보다 평등을 중요시하며, 이를 목숨 걸고 지키려 한다. 문제는 그 평등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절대적인 평등이 아닌 오징어게임 세계를 유지하는 수준까지만 적용될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임의적인 평등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 상당량의 상금이 있다.

2. 그 상금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내가 프론트맨이 되어 게임을 구성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평등한 룰을 가진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어떠한 게임을 만든다고 해도 신체적/지적/환경적 조건에 따라 누군가는 반드시 우위를 점하고 그에 따라 누군가는 반드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동일 선상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오징어게임은 이런 불평등한 부분을 '어쩔 수 없고', '합당하고', '당연한' 부분으로 만들어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시스템이 평등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참여하는 참가자들 역시 유사한 사고를 거친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얻는 상금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면 내가 반박할 수 없는 일정 부분은 무시할 수 있는 선을 그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나만의 정의'를 만드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약한 여성이나 노약자가 게임에서 불리한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진 정보는 나의 힘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운도 실력이다'

그렇게 다수의 정의와 시스템이 만들어낸 합의된 정의는 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소수를 도태시키고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사라지게 된다.



현실의 오징어게임

오징어게임이 추구하는 부조리한 평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평등, 공정, 공평, 정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며,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평등해 보이는 이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극도로 불공평하다. 이들은 사회가 쳐놓은 경계에 들지 못한 채 온갖 불평등과 불공정을 감내해야 하만 한다. 사회의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은 경계 밖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회적 약자가 된 이유는 시스템의 부조리가 아닌 그저 '노력이 부족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에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살아남은 이들의 상금이 증가했듯이, 현대 사회의 우리들 역시 끊임없이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부를 축적한다. 자본의 총 가치는 무한히 늘어나는 것이 아닌 한정적인 것이며, 누군가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는 부를 잃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와 오징어게임과 차이점이 있다면 자본의 갈취를 내가 직접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복잡한 층위와 용어는 내가 획득하는 부의 출처를 가리고 정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탈바꿈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현대 사회의 각 계층을 대표한다. 소수의 엘리트 계급을 대표하는 218번 조상우와 111번 의시 병기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하위 계층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아남는다. 101번 장덕수는 무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엘리트 계급의 신변을 보호함으로써 정보를 독점한다. 외국인 노동자이자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이기도 한 199번 알리는 엘리트 계급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뺏기고 살해당한다. 개신교 목사인 244번 기도남은 성경 말씀을 오로지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다. 그에게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악행에 대한 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001번 오일남은 병약한 노인세대를 대표한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소외시킨다. 하지만 오일남이 이 게임의 흑막이었듯이, 노인 세대는 현시대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새벽과 지영


오징어게임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여성들이 겪고 있는 폭력 역시 여실히 드러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은 불이 꺼지고 폭력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가장 먼저 살해당한다. 212번 한미녀는 생존을 위해 가장 강해 보이는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지만 금세 배신당한다. 240번 지영은 목사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를 잃고 자기 손으로 직접 아버지를 살해했다. 탈북민 여성 067번 강새벽은 여성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 무대에서 여성들과의 연대를 시도한다. 한미녀의 도움을 받아 사전에 게임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고, 지영과 함께 팀을 구성하여 살아남고자 한다. 하지만 게임의 불공정함은 지영을 희생시켰고 새벽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최종 게임 직전까지 살아남았던 강새벽은 결국 조상우에게 살해당한다. 아버지,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여성, 신체적 폭력에 무기력한 여성 등 오징어게임은 이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에서 폭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단순히 혐오라고 보기에는 이들이 당한 폭력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가자들 사이에 456번 성기훈이 있다. 성기훈은 자동차 공장 해고 노동자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직장, 친구, 가정을 모두 잃은 피해자이다. 그는 두 번째 설탕 뽑기 게임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게임에서 자신의 능력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살아남는다.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데에서 쾌감을 주는 기존 데스게임 장르의 문법을 박살내면서까지 성기훈이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기훈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대표라면 오히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닐까.



어째서 오징어게임일까


오징어게임과 VIP


이 작품에서 가장 존재 이유를 알기 어렵고 재미없는 게임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게임을 뽑을 것이다. 남자 둘이 비 오는 날 칼 들고 투닥거리는 장면부터 어떤 재미를 찾으라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VIP들은 이게 너무 재밌다고 즐겁게 관람하고 있다. 이렇게 가장 재미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게임의 이름인 '오징어 게임'이 하필 이 게임 무대 자체를 대표하는 이름이자 작품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오징어게임일까.


마지막 오징어게임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2인은 해고 노동자 성기훈과 엘리트인 조상우이다. 성기훈은 '공격'을, 조상우는 '방어'를 맡는다. 조상우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성기훈은 그 영역을 차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구조는 엘리트 계급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 즉 노동자 혁명을 연상케 한다. 남몰래 온갖 수법으로 노동 계급을 탄압하던 엘리트 계급은 종전에는 맨몸으로 노동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소수의 최상위 계급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부를 이용하여 이들의 분쟁을 조장하고 그로부터 재미를 보지만, 정작 바닥에서 투쟁하는 이들은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오징어게임의 최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최종장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층과 이들로부터 자신의 이권을 지키고자 하는 엘리트 계급 간의 충돌,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극소수의 VIP로 이루어지는 게 된다. 이러한 구도의 투쟁은 역사적으로도 수없이 발생해왔고, 현실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기에 성기훈의 우승은 오히려 대단히 현실적이다. 엘리트 계급에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해냈지만, 그 승리는 결국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졌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노동 계급 혁명은 결국 극소수의 노동자가 돈을 받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은 실패했고 시스템은 유지된다. 성기훈이 속해 있던 자동차 공장의 투쟁이 그랬고, 현실에서의 쌍용차 사태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성기훈은 왜 돈을 쓰지 않을까

성기훈의 혁명은 결국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수중에 들어간 456억의 돈은 그에게 합당한 대가가 될 수 없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된 피로 이루어진 돈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기훈이 자동차 공장 투쟁 당시 회사로부터 복직과 돈을 대가로 투쟁을 와해시키라는 제안을 받았다면 그걸 이행했을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두 눈으로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겪는 피해를 보았고 심지어 동료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을 제외한 455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받았다. 성기훈이 돈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알량한 자존심이나 죄책감 따위가 아니다. 그 돈이 사람들을 죽이는 시스템에 자신이 굴복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


붉은 머리

그렇기에 성기훈은 다시 한번 시스템에 저항을 시도한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이전 게임의 투쟁과는 시작 지점이 다르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믿음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존이 아닌 모두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붉은 깃발이 되어 다시 한번 현실의 데스게임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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