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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by 후현

"집주인이랑 연락은요?"

"뭘 새삼스럽게, 여기도 전세사기피해주택이야"


선배는 제 집 마냥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문 틈 사이로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너무 오래되어, 끝내 부패해 버린, 산 자는 가질 수 없는 체취. 빌라 2층 끝 방, 누군가 여기서 홀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 테니까 먼저 하고 있어”


문 열기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선배는 자취를 감추었다. 사수의 농땡이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해코지 안 하는 게 어딘가 싶어 체념한 채로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현장은 비교적 깔끔했다. 굴러다니는 고지서 몇 장, 전세 사기 피해자 불인정 서류,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책장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꽂혀있다. 유품을 정리하려다 책상 위에 노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유독 손떼를 많이 탔다. 나도 모르게 노트를 펼쳤다. 이런 건 뒷 끝을 생각해서라도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배웠지만, 그걸 알려준 당사자가 노는데 좀 어기면 어떠한가. 얼핏 보니 일기인 것 같다. 뒷 페이지는 안 봐도 힘든 내용일 게 뻔해 앞 페이지로 넘어갔다. 선배는 한참 뒤에야 올 테니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다.



[20xx년 4월 1일]


학교 운동장의 조명은 너무 거대하다. 고작 운동장을 비추는 것뿐인데 역할에 비해 너무 압도적인 외형을 가졌다. 커다란 스탠드에 주렁주렁 달린 조명들은 여러 개의 눈알을 가진 괴물을 연상시킨다. 자세히 보니 조명들 중 몇 개가 고장 나있었다. 눈알 몇 개는 계속 깜빡였고 다른 몇 개의 눈알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다른 눈알들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안광을 내뿜었다. 그래서 운동장은 밝았다. 나는 그 운동장의 농구 코트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기구한 가정환경이나 첫사랑의 아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농구공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런 같잖은 이유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하든 간에 처음 도전할 때는 항상 평균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었다. 주변에선 놀라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그것에 재능이 있다고 여기게 됐다. 그러나 배우고 연습할수록 실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마침내 최종 평가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쳤다. 당연히 못할 수도 있다.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열심히 할수록 실력이 줄어드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하면 할수록 실력이 줄어드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슛을 시도했을 때는 공이 끊임없이 골망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연습할수록 실력은 수직하락했다. 수행평가가 목전에 다가온 오늘 저녁, 나의 골 개수는 수행평가 합격선에 한참 모자라는 수치가 되었다. 그래서 울고 있었다. 억울해서. 물론 억울할 때만 우는 건 아니다. 슬퍼도, 화가 나도, 무서워도, 우선 눈물부터 났다. 대한민국 남학생에겐 사형 선고 수준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참아보려고 별 수를 다 써봤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눈물부터 짜는 찌질이고, 이는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그중 아버지가 가장 크게 실망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역임해 오던 아버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식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다. 자식으로서 참 다행이었지만, 온 힘을 다해 참는 아버지의 분노가 느껴지는 것까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누구보다 남자다운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툭하면 울고, 삐지고, 도망치고, 거짓말하고, 친구도 없는, 그야말로 납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나의 아버지는 그 불같은 성정을 억누르고 나에게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다만 다분히 실망스럽다는 그 감상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내가 눈물을 보이면 아버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괴물 같은 조명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연습했다가는 아예 한 골도 넣지 못할 것 같았다. 눈알들은 끈질기게 쫓아와 나를 비췄다. 마치 조명이 비치는 무대 한가운데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나는 수많은 눈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슛을 선보이곤 울고만 있다. 조명 때문에 관객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틀림없이 비웃고 있을 것이다. 관객 여러분, 부족한 공연을 선보여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실망스러우신가요? 부끄러우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제가 부끄럽습니다.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센서등이 채 켜지지 않아 발에 치인 것이 무엇인지 볼 수가 없다. 아마 누군가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들어간 것이리라. 아직 들어서지 못한 나머지 한쪽 발을 대충 현관 안으로 욱여넣은 뒤 문을 닫았다. 곧이어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신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이 너무 많아 현관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4인 가정의 현관이라고 하기엔 낯선 광경이었다.


"xx아"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불렀다. 거실을 보니 이모가 있었다. 원래 이모네 집과 교류가 잦았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건 시간과 표정이다. 왜 이모가 이 늦은 저녁 시간에 우리 집 거실에서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부른단 말인가.


"이모? 이게 무슨......"


나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와 여동생, 이모, 이모부, 그리고 다른 친척들까지. 모두 작아져 점이 되고 싶어지는 것 마냥 고개를 수그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고, 누군가는 뚫어져라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뭔가 잘못됐다.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나는 이 불안을 해소해 줄 사람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곧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의 얼굴은 모든 빛과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 마냥 텅 비어있었다. 뒤이어 어머니의 갈라진 음성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빠 시신이 발견됐대"




복도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자주 고장이 나서 사람이 와도 안 켜지기도 하고, 반대로 사람이 안 와도 켜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모부가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xx아"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안경을 쓴 선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모부를 존경한다. 아니 선망한다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할 것 같다. 항상 웃는 얼굴, 아들과 사촌들에게 보이는 친절함, 공기업에서 벌어오는 안정적인 수익, 좋은 아파트, 좋은 차.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인 중산층을 나타내는 가족 같았다. 나는 존경하는 인물을 적으시오 라는 질문을 보면 딱히 떠오르는 위인이 없어 그냥 이모부를 적곤 했다.


"그래 우선 지금은 실컷 울어"


또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열린 수도꼭지 마냥 눈물이 저항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모부는 내 옆에 앉아 내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고개를 들자 이모부가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실컷 울고 집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울면 안 돼"

"네?"

"xx아, 이제부터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야. 아직 학생이지만, 그래도 이제 네가 이 집안의 유일한 남자야. 네가 엄마랑 동생을 지켜야 해. 네가 무너지면 나머지 가족도 다 무너질 거야."

".….."

"이모부는 먼저 들어갈게. 마저 울고 집에 다시 들어올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와. 알았지?"


이모부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복도 불이 꺼졌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충격을 받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문자 그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역임해 오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이 집 안의 유일한 남자는 나다. 나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평소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의무감 같은 것이 치솟았다. 우선 당장 해야 할 일은 이 빌어먹을 눈물을 더 이상 흘리지 않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봤다. 소용없었다. 스스로 뺨을 후려쳤다. 역시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손목으로 관자놀이를 세게 두들겼다. 머리가 울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여전히 울기만 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담아 더 세게 후려쳤다. 머리가 너무 아파 더 이상 때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겨우 눈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혹시 다시 눈물이 쏟아질까 이를 악물고 집 현관문을 열었다.



[20xx년 4월 2일]


전화 소리가 그칠 줄을 모른다. 눈을 뜬 나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엄마야"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슬펐다. 아, 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사실이 이제야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돌아가셨다'가 아니라 '시신이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그럼 어제가 아닐 수도 있나? 잘 모르겠다.


"엄마가 지금 지방 내려가는 중이야. 시신 수습도 해야 하고 경찰서도 가야 해.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장례는 내일부터 치르기로 했어.

".….."

"엄마가 경황이 없어서 담임 선생님께 제대로 설명을 못 드렸어. 학교 가서 선생님께 제대로 말씀드리고 장례식 날짜도 알려드리고 와. 동생 담임 선생님한테도 같이 말씀드리고."

"네"

"엄마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늦게 들어갈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알았지?"

"네"


수화기를 내려놓고 집 안을 둘러봤다. 적막함이 감도는 집은 한 없이 낯설다.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 있어서 이기 때문일까. 아니지.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 집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내 방이 눈에 들어왔다. 불 꺼진 방 안에 서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누워서 자는 척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거짓말이 제일 나쁜 거라 했지"


지독한 술냄새가 났다. 이 정도면 보통 취한 게 아니다.


"복도에서 불 켜져 있는 걸 다 봤는데 왜 아빠 들어오자마자 껐어? 아빠가 싫어? 너도 나 무시해?"


복도 첫 집인 우리 집, 그중에서도 내 방 창문은 복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술에 취한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급하게 끄긴 했는데 아무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자는 척 그만하고 나와"


나는 별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거실로 나섰다. 거실로 향하다 보니 안방이 눈에 들어왔다. 불 꺼진 집, 닫힌 안방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온다. 그리고 빛과 함께 악 지르는 소리도 같이 새어 나온다.


"이 집 명의는 내 이름으로 돼있어"

"명의? 당신이 이 집 살 때 한 푼이라도 보탰어? 이 집 온전히 내가 모은 돈이랑 대출로 산 돈이야. 근데 뭐? 명의?"

"그러니까 내가 더 불려서 배로 갚는다고"

"그냥 열심히 모아서 갚자니까! 도대체 왜 집을 팔아야 하는 건데!"

"이거 진짜 돈만 있으면 무조건 되는 사업이야. 다른 친구들 이미 다 투자했다고. 내가 관리자로 일하면서 다 세팅해 놓은 건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돈 한 푼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게 말이 돼? 잠깐만 월세 같은 데서 좀만 버티면......"

"집 담보대출까지 받아서 사업하다가 날리고, 보증 서서 날리고, 어디로 이사를 가자, 저기로 이사를 가자, 이제는 뭐? 집을 팔아서 투자를 해?"

"아니 이번에는 진짜"

"이번에는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이 집 절대 못 팔아. 집 팔면 이혼이야!"


부모님은 이혼하실까? 이혼하면 나랑 동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잘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라 그런지 조금 무뎌진 것 같았다. 거실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가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말하고 나는 그 내용을 타자로 치고 있다. 프린터에서 크게 차용증이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나왔다. 인쇄된 종이를 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이 적혀있던 걸로 봐서는 어머니가 알면 안 되는 내용 같다. 고개를 돌리니 내 방 맞은편 동생의 방이 보인다. 동생의 침대 밑, 내가 바닥에 누워 자고 있다. 아버지가 나를 깨웠다.


"너 설마 동생 방에서 잔 거야?"

"......"

"야...... 진짜...... 진짜 쪽팔리지도 않냐? 어떻게 사내새끼가 동생, 그것도 여자애 방에서 잘 수가 있냐.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안 창피해?"


창피하다. 죽도록 창피하다. 지금 당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미칠 듯이 후회된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걸. 아무리 죽을 것 같이 무서워도 그냥 참을걸.


"참 진짜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나오네. 어떻게 오빠라는 게 밤에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고 여동생 방에 기어들어가? 네가 그러고도 오빠야?"


부끄럽다. 화가 난다. 눈물이 난다. 더 이상 아버지의 비아냥을 견뎌낼 수 없다. 저걸 더 들었다간 나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아니 죽어도 좋다. 이 분노를 터트려야만 한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오빠?"


예상치 못한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동생이 침대에서 눈을 반쯤 감은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졸음이 가득했던 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슬픔과 황망함이 들어찼다. 불쌍하다. 동생이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많이 아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었다. 동생은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정말 선한 사람으로 자랐다. 누구와는 다르게.


"아니야, 더 자"


동생이 다시 눈을 감았다. 계속 잤으면 좋겠다. 적어도 겪어야 할 모든 슬픔을 꿈결에 다 흘려보낼 때까지는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생은 이런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다시 잠에 든 동생을 뒤로한 채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섰다.




이미 수업이 한참 진행 중인 학교의 풍경은 평화로워 보인다. 화창한 햇살 아래 축구를 하는 사람들, 운동장 주변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수업 소리, 종소리, 새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 먼 곳에서 들려오듯 아련하게 울린다. 뭔지 모를 그리움을 자극한다. 내가 학교에 그리워할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낯설다. 화목해 보이는 학교는 나의 세계가 아닌 것 같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기분으로 억지로 경계를 넘어 학교로 침입했다.


교무실에 들어서려는데 익숙한 욕지거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같은 반 남학생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 시간에 나온 걸 보니 아마 담배를 피우러 나온 모양이다. 둘과 눈이 마주쳤다.


“어! 뭐야 저 새끼 오늘 안 나오더니 저기서 뭐 하냐”

“좀 닥쳐봐. 친구야! 거기서 뭐 해!”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다.


“근데 저 새끼 왜 또 교무실 앞에 있냐. 뭘 또 꼰지르려고“

“아 좀 닥쳐보라니까. 친구야! 오늘 학교 왜 안 나왔어? 어디 아파?”


무서웠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둘러대야만 했다. 가증스러운 말에서 가까스로 힌트를 찾았다.


“아…… 나 그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거 말씀드리러 왔어”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입원이야. 지금 친구끼리 거짓말하는 거야?”

“아! 그 나도 지금은 멀쩡해서 잘 모르겠는데 병원에서 우선 입원해야 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마구 쏟아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말이나 내뱉던 중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나를 다그치는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뒤이어 아버지는 손을 얹은 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주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으셨다. 아버지가 나를 저런 표정으로 본 게 대체 언제였더라?


“나는 이 친구 참 맘에 들더라. 아주 남자답고 괜찮아. 친하게 지내라”


내가 학교폭력 신고 후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다. 다시 눈물이 나려 하길 시작했다.


“……야! 야!”

“응?”


험악한 두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친구 사이여도 말을 막 씹고 그러면 안 되지?”

“응…… 미안……”

“아무튼 오늘 수업 안 들어오고 교무실 온 건 그냥 아파서라는 거지?”

“응”

“그래 친구야. 건강 관리 잘하고. 가자. “


둘은 담배 필 시간이 부족했는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야 저 새끼 담임한테 또 뭐 이르는 거 아니야?”

“우리가 뭘 했는데. 그리고 나 저 새끼 아빠랑 베프 먹었다니까?”


이미 꽤 멀어졌음에도 대화가 귀에 또렷이 박혔다. 나는 평생 이룰 수 없는 관계를 남의 집 아들이 해냈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참으려 한참 동안 교무실 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세상은 구덩이 같다. 물리적인 생활 반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학교, 학원, 집만 반복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학생들이 겪는 것이니까. 내가 말하는 이 구덩이는 내가 직접 파내려 간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일을 겪으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거절의 의사표현을 한다면 나는 이를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파고든다. 별 감정 없이 자기 의사를 표현했을 뿐인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마음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된다. 말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끊임없이 안 좋은 방향으로 해석한 끝에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를 완성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 한 번도 이 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탈출하는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도 없다.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뿐더러 알아도 도와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구덩이가 됐다. 그 누구도 들어오려 하지 않고, 그 누구도 나갈 수 없는 거대한 공동. 물론 장점도 있다. 안전하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외롭다. 그리고 미치도록 답답하다. 공격에 대한 불안과 지독한 외로움 사이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건 전자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는 길인 지금도 끊임없이 마음에 구덩이를 파고 있다. 문득 학교 근처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이 산 입구로 들어섰다. 왠지 산을 오르면 이 답답함이 해소될 것만 같았다. 구덩이를 기어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동네의 경관이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겨우 올라갔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구덩이 파기는 잠시나마 멈출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셔도 답답함은 여전했다. 역시나 등산은 싫다. 자기 의지로 올라온 건 처음이었지만 그 감상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아버지에게 강제로 끌려왔었다.


"그래. 소감이 어때?"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소감이 어떠냐니. 힘들다. 피곤하다. 평일 새벽 5시의 등산은 이 두 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대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없는 체력을 쥐어짜 내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힘든 걸 해내보니까 다른 게 다 별 거 아닌 거처럼 느껴져요"


나는 조심스럽게 가증스러운 대답을 한 후 아버지의 반응을 살폈다. 어스름이 깔린 아버지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그래 인마! 그거야! 응?"


아버지가 나의 어깨를 강하게 두들겼다. 몸이 조금 절벽 방향으로 기울었다. 급하게 균형을 잡았다. 발치에 있던 작은 돌조각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빠가 괜히 새벽부터 너를 데리고 산에 온 게 아니야. 직접 해보니까 알겠지?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숙제하고 이런 거 다 별 것도 아니야. 아빠는 어렸을 때 이런데 살았어서 매일 같이 이렇게 등산해서 학교를 갔다고. 학원? 그런 게 어딨어. 그러니까 다 감사하게 여기고 방금 말했던 거 잊지 말고. 알았지? “


죄송합니다 아버지. 거짓말이에요. 저는 등산도, 학교도, 학원도, 공부도 싫어요. 저는 잘하는 게 없어요. 저는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


"네"


마지못해 겨우 대답했다. 아버지가 아까보다 더 강하게 등을 두들겼다. 몸이 더 크게 비틀거렸다. 무서웠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 공포에 떨고 있는 나뿐이었다. 더 이상 절벽에 서있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내려가야겠다. 나는 다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등산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젠 울면서 땅을 파고 있다는 것이다.



[20xx년 4월 4일]



"xx아. xx아."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뜨자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저기 방 하나 있는데 들어가서 좀 잘래? 이제 늦어서 사람들 안 올 거야"


둘러보니 확실히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미 복도 불은 꺼졌고 우리 쪽 장례식장의 일부만 불이 켜져 있었다. 식당에는 꽤나 취한 아버지의 친구들과 뒷정리를 하고 있는 친척 몇 분이 전부였다. 문득 내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장례식장에서 대여한 상복은 여기저기 구겨지고 해졌다. 사이즈도 맞지 않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오른팔에는 상주가 차야하는 완장이 옷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모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이라는 말이 벌써 현실이 되어 오른팔에 매달렸다.


"괜찮아요"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거워진 오른팔을 매만지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사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실물보다 더 선명한 아버지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혼내려는 것 같았다. 아들이나 되는 놈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졸다니. 결국 나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 그럼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나올게요"


몸을 일으키려는데 멀리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에 남은 아버지 친구분들이 누굴 기다린다고 했는데 아마 그분인 것 같았다. 내가 오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서럽게 울었다. 그 서러움이 전염되었는지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울어선 안된다. 아버지가 옆에서 보고 있다.


"아이고 대장! 대장!!"


나이 오십 줄에 대장이라니. 도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아직도 대장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단 말인가. 어릴 적 아버지의 위상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버지의 실망이 더욱 이해가 갔다. 골목대장의 아들이 게임만 하는 거짓말쟁이에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라니. 화가 날만도 했다.


"네가 대장 아들이구나"

"네"


오열하느라 절도 제대로 못한 아버지의 친구가 나를 덥석 붙잡았다. 새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애써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얼마나 네 자랑을 많이 했는지 아니?"

"네?"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남에게 내 자랑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뉘앙스조차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자랑이라니?


"그래! 얼마 전에도 그 뭐야, 학교에서 무슨 분반할 때 상반에 들어갔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친구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식당에 남아있던 다른 친구분들이 그만하고 와서 한잔하라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우리 학교는 예체능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과목에 이동 수업을 적용한다. 지난 시험 성적에 기반하여 반을 상중하로 구분하는 것이다. 상반에 속했다는 건 해당 과목에 상위 33% 안에 들었다는 걸 뜻한다. 1등도 아니고 1등급도 아니다. 그냥 무식하게 1/3로 떼어냈을 때 첫 번째 덩어리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여러 개의 과목 중 단 한 개의 과목에서 상반에 포함되었다. 나머지는 중반 아니면 하반이었다. 딱히 대단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거라도 자랑을 하고 싶어 집에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소소하게 좋아하셨고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들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런데 자랑이라니. 그렇게 자랑할 거였으면 왜 나를 그렇게 대한거지? 안에서는 한없이 부끄러워하던 자식을 바깥에서는 자랑했다고? 도대체 왜?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xx아 이제 진짜 들어가서 좀 쉬어"


어머니가 내 상태가 안좋아보였는지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덥석 받아들였다. 더 이상 아버지의 눈빛도, 친구들의 통곡 소리도 견딜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사라져 있기를 바라면서.



[20xx년 4월 5일]


장례식 마지막 날, 화장터로 이동해야 하기에 장례식장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가족 분들 이동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금 얼굴 보실 수 있습니다."


상조 직원의 안내가 들렸다. 어머니와 동생은 주저 없이 상조 직원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xx아 얼른 쫓아가야지 뭐 해"

"아...... 저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대답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이상하게 볼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저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있기로 했다.


고개를 드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3일간 씻지 못해 떡진 머리칼, 구겨진 상복, 불안에 떨고 있는 눈빛. 도대체 뭐가 불안한 걸까. 꼴불견이다. 거울에 있는 저건 정말로 흉측하게 생겼다. 아 눈빛이 바뀌었다. 거울의 흉측한 것은 이제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밖에서 어머니와 동생의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짧게 보고 온 모양이다. 조금만 더 있다 나가야겠다. 나갈 타이밍만을 숨죽인 채 기다렸다. 거울은 더 이상 보지 않았다.




화장이라는 과정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살뿐만 아니라 뼈까지 재로 만드는 일이다 보니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는 꽤나 합당하다고 느껴졌다. 평생의 세월이 누적된 육신이 몇 분도 안되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그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남은 가족들은 고인의 육신이 실시간으로 불타오르는 장면을 유리 너머로 2시간가량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화장을 하기로 결정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걸 겪고도 다들 괜찮은 척 살아나갈 수 있는 거지? 여긴 지옥이다. 유리창과 스크린 너머 보이는 불꽃은 고인의 육신을 넘어 내 정신까지 불태우고 있다. 우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저 불꽃을 시야에서 없애는 게 급선무였다. 문제는 시각을 차단하자 이번엔 청각이 부각됐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싶어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왼쪽으로 세 칸 떨어진 화장장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중 한 명은 승복 차림이었다. 스님은 염주를 쥔 채 두 손을 모으고 염불을 읊고 주변에서는 이를 따라 하고 있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 세 칸 떨어진 화장장, 이번에는 목사님이다. 목사님과 주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면, 천주교 신자이신 어머니의 친구분들이 어머니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곳, 이 순간, 딱 세 팀만 있는 화장터에 대한민국의 3대 종교가 모두 모여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몰래카메라 같은 상황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더욱 거슬리는 건 소음이었다. 고인을 위하는 건지, 스스로를 위하는 건지, 그냥 신을 찾는 건지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은 기다란 복도 형태의 화장터 내부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실내를 마구 쏘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의 진동 같은 것으로 뭉쳐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두통에 귀를 틀어막았다. 소용없었다. 이제 소음은 머리 내부로부터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버지의 화장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이 고통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 생각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스님이 있던 곳을 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버지였다. 염불을 외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성경을 읊으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정면에서는 신부복의 아버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 명의 아버지가 나를 빙 둘러쌓았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각자의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입을 벌리고 힘을 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얼굴 안에 어떠한 것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더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xx아”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이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그새를 참질 못하고……”


나는 잠들었었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불타고 있는데 의자에 앉아 잠에 들었다.


“…… 끝났으니까 빨리 와”


사람들이 앉아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화장장 뒤편으로 향했다. 유리 넘어 나까지 불태워버릴 것 같았던 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꺼져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이번에 터지면 정말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물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참아내지 못했던 눈물이 이제는 저절로 참아졌다. 아, 아까 생긴 벽이다. 얼굴 안쪽에 생긴 벽이 눈물을 가로막았다.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 눈물을 참으려 발악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유리 넘어 불 꺼진 화장장을 바라봤다.


아버지. 저 이제 더 이상 안 울어요. 기쁘시죠? 혹시 자랑스럽진 않으세요?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당당하게 마주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아버지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젠장"


이게 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일기를 한 번도 안 써 본 나도 알 수 있다. 앞에 날짜만 적혀 있을 뿐 이건 하루를 정리하는 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차라리 비명에 가깝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아우성을 적은 걸까.


"뭐야 하나도 안 했어?"


선배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읽어버렸다.


“아니 선배 이거…”

“말하지 마. 하나도 안 궁금해. 채무 관계, 통장, 그 외 재산 먼저, 그 뒤로 가족 전달해 줄 유품, 다른 건 알 바도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 이거 뭔데, 일기지? “


선배는 노트를 빼앗아 유품 박스에 던지듯 놓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망설였다간 정말 혼날 것 같아 억지로 작업에 동참했다. 박스에 덩그러니 놓인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정말 유족에게 전달해도 될까. 아니지. 이건 내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다시는 유품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노트에서 자꾸만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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