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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Jul 28. 2024

시선

영화감독 '나루세 미키오'와 영화 <흐르다>에 대하여


지난 4월부터 약 2달여간 대전 지역 청년 영상 창작자 커뮤니티 INK에서 연 씨네클럽에 참가했다. 씨네클럽의 주제는 일본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다루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즐거웠던 경험이었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저급한 심미안을 절실히 체감하여 속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영화 보는 걸 조금 좋아하는 사람 정도이지 영화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INK 구성원 분들의 설명 덕분에 세 감독의 위대함의 편린이나마 엿볼 수는 있었으나, 그 감상을 글로 풀어내기에는 내 수준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이 글 서론에 INK를 언급해도 되는지 조차 정말 많이 주저했다. 그럼에도 염치 불구하고 씨네클럽을 서론에 써버린 이유는 이 수준 낮은 글의 탄생을 설명할 명분이 이것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2달간의 경험이 그냥 휘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몸부림이자, F학점이라도 면하고자 낙재생의 마구잡이로 작성하여 제출한 과제이다.




영화 <산쇼다유>
영화 <오차즈케의 맛>


미조구치의 <산쇼다유>에서 사진의 인물 카야노는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안주가 열고 도망간 문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가 안주가 도망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카야노는 주인공과 같이 일하는 노예들 중 한 명 일뿐 주요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저 신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함과 애틋함, 그리고 절망감을 느꼈다. 오즈의 <오차즈케의 맛> 말미에서는 모키치, 타에코 부부가 화해하는 신이 나온다. 공항에서 돌아온 모키치가 타에코와 함께 주방에서 오차즈케를 만드는, 단순한 부부 화합의 장면이다. 영화 초, 중반부에도 자주 등장했던 장소, 구도, 인물들이다. 그런데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이 신은 단순 화합을 넘어 일종의 환상감과 신비감, 그리고 약간의 공포감까지 선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장면같기도,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두 장면이 뭐가 그렇게 아름답고 위대하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머릿속에서 도저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다. 이런 감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영화 감상의 폭도 넓혀 보고 이런 씨네클럽 같은 것도 참가해 보는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시네마라는 미지의 심연만 발견하고 좌절하고 만다. 유수의 평론가들이 말하는 시네마의 위대함이 이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만 해볼 뿐이다.


하지만 오늘 글의 대상은 앞서 말한 미조구치나 오즈가 아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다. 나루세 감독은 다른 두 명의 감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주제는 주로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한 서사,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경계를 밟고 올라서거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고양이, 미싱기<->샤미센/양복<->기모노/구두<->게다 등으로 대비되는 이미지, 골목에서 항상 놀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 가족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내가 나루세의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바로 카메라이다. 싱글 쇼트 및 리버스 쇼트를 완전히 배제하는 미조구치, 정면에서 인물을 바라보며 보이스오버조차 허용하지 않는 싱글 쇼트를 쓰는 오즈와는 다르게 나루세는 화려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싱글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적극 활용한다.


영화 <흐르다>의 후반부 씬에서 나루세의 이러한 쇼트 활용의 예시를 볼 수 있다. 2층에서 쓰타노(집주인)와 오토요(큰언니)가 대화를 하다가 사에키가 경찰서에서 돌아왔다는 오하루(가정부)의 말을 듣고 1층으로 내려간 장면이다. 테이블에는 사에키와 나마에의 숙부가 앉아있다. 테이블에서 부엌 방향으로 후지코가 기둥 옆에 숨어 어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고, 잘 보이지 않는 부엌에서는 오하루가 집안일을 하고 있다. 반대 방향에서는 가쓰요(딸)가 테이블에서의 대화를 듣고 있다. 대화를 엿듣고 있는 후경의 인물들이 각각 구세대의 직업, 복식 등을 거부하는 딸과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지켜보는 어린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쇼트 순서 (이미지 업로드가 순서대로 되지 않아 숫자가 뒤죽박죽)

#2 -> #1 (쓰타노가 중경으로 침입) -> #6 -> #5 -> #3 -> #4 -> #9 -> #12 -> #8 -> #11 -> 뒤돌아 선 오토요 싱글 쇼트 -> #3 -> #7 -> #3 -> #6 -> 오하루 싱글 쇼트 -> #2 -> #10 -> #5 (오버 더 숄더 쇼트가 아닌 싱글 쇼트) -> #10 -> #11 -> #2 -> #11


사에키와 나마에의 숙부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이 전경에, 가쓰요가 바깥으로 향하는 문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모습이 후경에 아웃포커싱되어 풀 쇼트로 잡힌다(#2). 다음은 정반대방향 풀 쇼트. 역시나 전경에는 테이블의 두 인물이, 중경에는 후지코가 이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며, 후경에서는 오하루가 집안일을 하고 있다(#1). 두 숏은 각자 반대방향에서 거리를 두고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는 가쓰요와 후지코를 보여줌으로써 두 인물의 시점 숏처럼 보인다.


중경에 쓰타노가 침입하며 인사말을 건네면서 풀 숏이 끝나고 나마에의 숙부를 클로즈업한다(#6). 가쓰요는 아웃포커싱으로 여전히 화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해당 숏의 시점 주체가 될 수 있는 인물은 가쓰요와 나마에의 숙부를 제외한 전원이다. 이 순간 아웃포커싱 되어있는 가쓰요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 방향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마에의 숙부 어깨 너머 사에키의 옆모습을 비추는 숏으로 넘어간다(#5). 이 시점은 매우 명백하게 가쓰요의 시점 숏이 된다.


그리고 다시 풀 쇼트가 나온다. 테이블에 있는 나마에의 숙부, 사에키, 쓰타노 3명과 후경에 자리 잡고 있는 후치코까지 총 4명이 한 화면에 자리한다(#3). 쓰타노가 오하루를 부르면서 쇼트는 여전히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는 후지코와 부엌의 오하루를 비춘다(#4). 다음 쇼트에서는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오토요와 오하루가 마주친다(#9). 이 세 쇼트를 기점으로 시점의 주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다음 쇼트는 가쓰요를 제외한 6명 전원이 한 화면에 잡히는 풀 쇼트로 전환된다(#12). 자연스럽게 쇼트는 가쓰요의 시점이 된다. 그리고 다시 오토요의 싱글 쇼트로 전환되며 테이블에 있는 인물들의 시점이 된다(#8). 오토요가 할 말을 마치고 쓰타노를 힐긋 바라본 뒤 뒤돌아서자 쓰타노의 싱글 쇼트로 전환된다(#11). 쓰타노가 말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오토요는 쓰타노를 보고 있지 않지만, 이전의 흘긋 바라봄이 카메라의 시점 쇼트로 남아 여전히 쓰타노를 바라보고 있다. 뒤돌아 떠나는 오토요의 싱글 쇼트, 그리고 다시 테이블 3인과 후치코까지 4인의 풀 쇼트로 전환된다(#3).


다음 쇼트에서는 현관을 나서려는 오토요와 이를 마중하는 오하루를 담고 있다(#7). 이 시점의 인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오토요의 배려를 빙자한 비아냥을 모두 듣는다.


다시 4인 풀 쇼트(#3)에서 나마에의 숙부 클로즈 업 쇼트(#6)로 전환된다. 나마에의 숙부가 오하루에게 리어카를 요청하자 어느새 현관에서 복도까지 걸어온 오하루를 싱글 쇼트로 비춘다.


다음은 테이블 3인과 가쓰요의 4인 풀 쇼트(#2)이다. 관망하기만 하던 가쓰요가 사에키를 부르면서 가쓰요(#10)와 사에키(#5), 쓰타노(#11)의 싱글 쇼트가 번갈아 등장한다. 다시 4인 풀 쇼트(#2)에서 가쓰요는 먼저 화면에서 퇴장한다. 쓰타노의 싱글 쇼트(#11)를 끝으로 신이 마무리된다.


특별한 사건도 없는 3분여 정도의 짧은 대화 신에서 7명의 인물과 14개의 쇼트(사진이 없는 2개 쇼트 포함)가 유기적으로 동작하는 화면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 신이 유려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이 하나 있다. 이 쇼트들이 단순히 인물의 시선을 따라 전환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쇼트는 인물의 시점에 따라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14개의 쇼트 중 4개(#3, #4, #7, #9)는 어떤 인물의 시점 쇼트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해당 시점에 인물을 식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시점 쇼트라고 보는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다른 영화에서 이런 쇼트들을 봤다면 '일부는 시선 쇼트가 아니구나'라고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흐르다>는 이런 가벼운 납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아웃포커싱으로 배치된 인물들로 인해 시점 쇼트처럼 보이는 풀 쇼트, 가쓰요나 오토요가 화면에 침입했듯이 언제 어디서 갑자기 화면에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외화면의 다른 인물들. 영화 내내 보여줬던 인물의 배치와 시점 쇼트는 어떠한 힘으로 작용하여 시점 쇼트가 될 수 없는 쇼트조차 시점 쇼트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4개의 쇼트는 누구의 시선일까? #3 쇼트의 방향 자체는 가쓰요가 있는 쪽이긴 하나, 각도와 거리감 모두 가쓰요의 시선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가쓰요의 옆에 누군가가 가쓰요와 같이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테이블을 바라봤다면 #3과 같은 시선 쇼트가 나오리라 상상해 볼 수는 있다. #4, #7, #9는 모두 쓰타노가 개입하고 있다. 쓰타노가 오하루에게 술을 주문하여 생긴 쇼트 #4, 그 술을 가져다주려다 오토요를 마주쳐 생긴 쇼트 #9, 현관문 밖으로 나서는 마지막까지 비아냥을 멈추지 않는 오토요의 쇼트 #7. 모두 오하루와 오토요가 중심이 되는 쇼트들이며, 그 인과는 모두 쓰타노를 향해있다. 따라서 이 3개의 쇼트들은 물리적으로 쓰타노가 바라보는 시점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쓰타노의 시점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들을, 더 나아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의 시점까지 오가며 신을 조망한다. 이런 카메라를 '특정 조건에 따른 특정 인물의 시선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해볼 수 있다. 만약 카메라가 거쳐간 수많은 시선의 주체를 단일 인물로 총화 할 수 있다면  그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변만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흐르다>의 쇼트는 단순히 시선을 포착하지 않는다. 인물의 표정 변화, 아웃포커싱된 인물의 고개 돌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인물의 행동, 인물의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도 모두 포착해 낸다. 여기서 쇼트가 가지는 미덕은 '이해'이다. 쉼 없이 전환된 시점 쇼트의 주체는 영화 속 이야기, 인물들이 처한 상황, 인물들 간의 이해관계, 각 인물들의 감정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즉, 카메라는, 시점 쇼트의 주체는 이해하려는 사람이자, 그 쇼트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이해시키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카메라의 노력은 종종 영화적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던 인물의 감정은 마침내 분출하여 화면 전체에 발화한다. 카메라는 등 돌린 가쓰요의 감정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올리고 요동치는 마음과 어머니에 대한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은 천둥과 비가 되어 카메라에 담긴다. 감정은 인물을 넘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친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감정의 날씨화는 사실 카메라의 부단한 노력이 이끌어낸 결실인 것이다.


오즈와 미조구치의 카메라에 잔인하다, 자비가 없다라는 수식어가 붙는 반면, 나루세의 카메라는 따듯한 시선이라 불린다. 이는 단순히 나루세의 카메라가 오즈와 미조구치에 비해 형식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표현이 아니다. 나루세의 카메라는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선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 시선에서 따듯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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