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현 Aug 28. 2024

토니의 세계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IYM2nAwtXBo&list=RDIYM2nAwtXBo&start_radio=1


스포일러 주의



토니의 대학 시절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대학생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아비판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것을…” 당시 책과 강연을 통해 어설프게나마 헤겔을 접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발전 과정을 떠올렸다. 그래서 영화에 ‘주인공 토니의 의식이 자아성찰을 통해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혹은 그중에서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한 성찰 과정’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나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했다. 주인공을 비롯한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성찰은커녕 과연 고민이라는 걸 하긴 하는 걸까 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저 한없이 불행했고, 외로웠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쾌했다. 왜 다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 단순히 물리적인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주인공 스스로 구원을 얻듯이, 인물들이 하다못해 자그마한 감정의 해소라도 느끼길 바랐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의 인물들은 독백만을 남긴 채 한 줌 재가되어 사그라들 뿐이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로 단순무식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토니  타키타니>는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아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토니는 아버지 쇼자부로의 연주를 듣고 분명 똑같은 연주인데 무언가 달라졌다며 도대체 무엇이 바뀐 거냐고 물어보고 싶어 했다. 나도 그랬다. 분명 똑같은 영화인데 무언가가 바뀌었다. 도대체 뭐가 바뀐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연주도, 영화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나였다.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프레임 안에 비추는 내화면이 아닌 더 이상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을 ‘외화면’이라고 부른다. 외화면은 영화의 매우 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상하다. 영상이 없는 영역이 어떻게 영화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영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아이러니하게도 되려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외화면의 공간은 관객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눈앞에는 없지만 인물들과 풍경들이 영화의 어딘가에, 외화면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영화를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외화면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한 가지 화두를 던지기 위해서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외화면 존재하는가?



<토니 타키타니>의 화면은 대단히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카메라는 왼쪽 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수평 트래킹으로 이동하다 암전된 화면 또는 오른쪽 벽을 마주치고는 다음 신으로 넘어간다. 이런 스타일은 영화 전체를 마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김혜리 평론가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관객에게 강물을 따라 흘러가며 배 위에서 기슭을 바라보는 감각, 밀봉된 영화 속 세계를 둘러싸고 객석이 공전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스타일이 주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강렬한 확신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얼마 안 가 반드시 끝난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은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빠르게 어둠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은 어느 시점부터 프레임 좌우의 외화면을 상상할 이유를 상실한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배경도, 인물도 아닌 벽이나 검은 화면이 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수평으로 이동할 뿐인 카메라는 프레임 상하의 외화면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원근감과 양감까지 억제된 화면은 배경 뒤, 인물이나 사물에 가려져 화면에 보이지 않는 외화면에 대한 상상조차 차단해 버린다. <토니 타키타니>의 신들은, 분명 움직이는 영상이지만, 하나의 고정된 세트장 혹은 회화(그림)와 같은 인상을 준다.


회화의 프레임과 영화의 스크린에 대한 차이점을 앙드레 바쟁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화의 프레임은 정지된 한 순간을 표현하며 그림 안쪽의 공간으로 시선을 끌어들여 구심적이다. 하지만 영화의 스크린은 세계의 일부를 보여주고 나머지를 가리며 프레임 너머의 더 넓은 세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스크린은 지속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원심적인 영화적 공간이다.


<토니 타키타니>의 스타일은 분명 회화가 아닌 영화임에도 바쟁이 말한 영화의 스크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가시적인 화면 영역이 도리어 비가시적인 외화면의 영역에 대한 상상을 차단한다. 영화 스크린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바쟁이 말한 회화의 프레임의 기능을 얻는다. <토니 타키타니>의 프레임은 분명 연속적이나, 그 움직임의 방향은 오로지 안쪽으로만 향하여 회화와 같이 구심적인 힘을 가진다.


자크 오몽은 바쟁의 논의에 반박하여 외화면의 개념을 다시 설명한다. 영화와 회화의 프레임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더 나아가 회화의 프레임에도 외화면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예술의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은 외화면이 아닌 ‘탈프레임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탈프레임화는 프레임 바깥에 대한 작업 및 그 작업을 통해 형성되는 미학적 양식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 미지의 경계이자 틀로서 프레임에 대한 위반과 전복 그리고 해체를 목표로 한다.


탈프레임화는 기본적으로 회화와 같은 고정 이미지에서 더 용이하기 이루어진다. 프레임에 의해 절단되거나 밀려난 이미지 조각들이 외화면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화에서는 이미지들의 계열에 함축된 연속성과 카메라의 운동성이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 또한, 서사성이 기본 조건인 영화에서는 논리적 전개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개별적 탈프레임화 쇼트에서 일어나는 지엽적인 일탈은 결국 재정리 및 재통합된다. 따라서 탈프레임화된 회화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미스터리나 불안이 관객에게 끝까지 긴장을 남기는 것에 반해, 영화에서 탈프레임화된 이미지들이 전하는 미스터리나 불안은 영화과 종료되기 전에 대부분 해소되거나 사라진다.


정지된 단 하나의 화면만을 제시하는 회화에서는 탈프레임화된 이미지가 외화면의 상상적 공간에 의지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탈프레임화된 이미지가 외화면에 대한 의지 없이도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지각될 수 있다. 언젠가는 다른 쇼트가 나타나 탈프레임화된 이미지를 정상화시킬 것이라는 관객의 기대가 외화면의 상상적 공간을 보충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외화면에 대한 상상으로도 보충되지 않는 영화 이미지들은 결과적으로 프레임의 주요 기능들을 모두 무력화시킨다. 이미지를 한정하고, 적절한 구도로 포착해 보여주며, 화면 내 영역과 바깥 영역 사이에서 중개 기능을 수행하는 프레임의 기능들이 모두 와해되는 것이다.


이렇듯 상상의 공간으로서 외화면을 파기하고 오로지 화면 내 이미지만을 관객의 사유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영화의 탈프레임화는 <토키 타키타니>에서 그 기능을 상실한다. 매 신마다 영화 내에 새로운 내부 프레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프레임 내의 이미지에서 멈췄던 관객의 사유의 방향이 다시 외화면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미지에서 내부 프레임의 외화면으로 향하던 사유는 영화의 물리적 스크린을 맞닥뜨린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기존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황량한 공간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기묘한 외화면과 공명하는 영화의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소리이다. <토니 타키타니>에서는 러닝 타임 내내 내레이터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물의 배경, 상황, 감정 등을 묘사한다. 영화에 내레이션이 나오는 것 자체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며, 오히려 편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영화의 몰입을 해치기도 한다. 그런데 <토니 타키타니>는 내레이션을 사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레이터가 인물의 감정에 대해 묘사를 하면, 해당 인물이 이를 말을 이어받아 문장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분명 영화의 외부에 존재하는 내레이터의 말을 영화 속 인물들이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회화와 같은 프레임, 탈프레임화와 재프레이밍의 반복,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의 말을 듣는 등장인물들까지. 이러한 특징들은 내부 프레임의 외화면을,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알 수 없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프레임 내에는 프레임보다 아주 조금 더 큰 각 신 별 내부 프레임이 존재한다. 두 프레임 사이에는 빈 영역이 형성된다. 이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은 카메라, 조명, 그리고 내레이터가 전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배경도, 인물도, 사물도, 관객이 외화면에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토니는 화면 내의 세계에서만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토니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계를 통틀어, 그는 진정으로 혼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타이틀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이 세계를 목격했다. 어린 토니의 식사 장면을 비추던 숏은 일순간 반대 방향으로 전환된다. 보이는 건 식사를 하고 있는 토니의 얼굴, 그리고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다. 토니가 끝끝내 외면했던 카메라 뒤의 고독한 우주, 어떠한 배경도, 인물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토니의 세계이다.




처음 <토니 타키타니>를 접하고 재관람하기 전까지 대학원을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고, 직장을 구하고, 30대가 됐다. 사회초년생이 되는 일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깊은 구덩이에 수도 없이 빠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구덩이를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하는구나'. 평서문이 아닌 명령문이다. 왜냐하면 나의 고통을 자신의 일인 것 마냥 기꺼이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서, 동시에 지치지 않고 자신의 삶도 기꺼이 살아나갈 수 있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개별적인 의식 주체가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차라리 사물에 가깝다.


갑자기 보잘것없는 누구나 아는 깨달음을 적는 이유는, 이런 지점이 토니가 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토니의 불안은 결핍에서 기인한다. 한평생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 마주하게 된 고독이라는 결핍이다. 그리고 이 결핍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다시 고독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영구히 해소해 주고 무한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나의 곁에 머물러 불안을 달래주고 사랑해 줄 것이 '보장된' 의식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사물이다.



결국 결핍도 개인이라는 총체를 이루는 일부이다. '그 사람은 그것만 바꾸면 참 좋을 텐데'와 같은 문장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그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핍은 불순물도, 해소의 대상도 아닌, 그 자체로 나다. 토니의 고독에 대한 불안은 에이코의 옷에 대한 집착으로 연결된다. 쇼자부로가 에이코에 대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물었을 때 토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애초에 토니가 사랑하게 된 건 에이코의 결핍이었으며, 그 자체로 에이코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독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으며, 에이코의 쇼핑 중독 역시 점점 심해진다. 마침내 그 결핍을 거부한 순간, 사랑은 끝이 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왜 이렇게 절망적이어야만 하는가. 출구 하나 보이지 않는 이 꽉 막힌 결핍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왜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고통받는가. 답은 영화에서 이미 보여줬다. 대물림받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쇼자부로를 금쪽이 상담소에 보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쇼자부로는 아버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애당초 아버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리고 토니는 물려받은 유전, 경험, 환경으로부터 그저 그렇게 태어나 자란 것이다. 그러니까 토니가 비로소 완전히 외톨이가 된 것은 여러 개의 엔딩 중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안타깝고 불운한 결말 같은 것이 아니다. 결핍을 지니게 된 순간 겪게 될 정해진 수순이다. 적어도 내가 책에서 느낀 바는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모음집 [렉싱턴의 유령]에서의 [토니 타키타니]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토니 타키타니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외톨이가 되었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은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에 어떤 장면이 추가되었다. 영화 말미, 토니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시도한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타다만 히사코의 사진과 연락처가 있다. 그녀는 에이코가 남긴 옷을 입어보다가 하염없이 울었다. 옷은 그림자이자 결핍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어쩌면 토니와 에이코의 삶을 통틀어, 그 누구도 그 결핍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찮게 에이코와 신체 사이즈가 같을 뿐인 히사코는 그 결핍을 입어보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깊이 눈물로 공감해 주었다. 토니를 완전한 고독의 세계에 가둬놨던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핍을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참고문헌


김혜리, "편재하며 영속하는 외로움의 연대기 <토니 타키타니>", 씨네 21 (2005)

심은진. "영화의 외화면과 외부의 사유." 인문과학연구 36 (2013): 117-135.

김호영. "회화와 영화에서의 탈프레임화 비교 연구: 드가, 크레모니니, 브레송, 스트로브-위예를 중심으로." 비교문학 86 (2022): 93-122.


작가의 이전글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