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뛰고 있더라
처음은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겨울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미지의 공포는 어떠한 실내 운동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운동을 하나라도 해야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었기에 수영 대신 마스크를 쓰고 달리기로 결정했다. 달리기는 항상 애증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농구나 축구에 인원 채우기 용으로 참가할 때, 밥먹듯이 하는 지각 때문에 뛰어야 할 때, 눈앞에 타야 하는 버스가 지나갈 때, 달리기는 항상 힘들지만 해야만 했다. 군대에서 뜀걸음을 할 때면 맨 뒤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완주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쓰러져서 이걸 시킨 사람들이 후회하게 만들어야겠다'라는 복수심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기는 언제나 잘하고 싶지만 동시에 너무 하기 싫은 것이었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환경은 달리기에 대한 증오를 한켠에 밀어두기에 적절한 핑계였다. 오랜만에 뛴다는 기대감에 조금 들뜬 채로 다시 한번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금방 지치고 말았다. 몇 개월을 꾸준히 달렸지만 노래 한 곡을 다 채우지 못하고 소진되는 체력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치워둔 증오는 더 커져서 돌아왔다. 전염병의 공포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달리기에 대한 열망이 먼저 식고 말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어쩌다 친구의 마라톤을 구경하게 됐다. 마라톤 중 가장 짧은 5km였지만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뛴다며 걱정했다. 30여분 뒤 완주에 성공한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진심으로 기뻐 보였기 때문이다. 환희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못 뛸 줄 알았는데 완주했다며 환하게 웃는 친구의 표정에는 조금의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기뻐하다가 문득 부러워졌다. 내가 저런 표정을 지어본 게 언제더라. 그냥 운동일뿐인데 무엇이 저런 감정을 유발한 걸까? 이전의 달리기에 대한 열망과 실패들, 그리고 현재의 무기력, 무의미, 무가치 같은 것들이 한 번에 몰려왔다. 갑자기 달리기가 내 모든 문제의 해결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뛰어보기로 결심했다.
달리기가 유행하기 시작해서인지 코로나 때에 비해 정보가 넘쳐났다. 맘에 드는 훈련 계획을 찾아 따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실력이 금방 늘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10km에 도전했다. 기존의 체력을 고려했을 때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다. 정말 기뻤다. 첫 기록이 이 정도니 앞으로는 더 잘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첫 기록을 경신하지 못했다. 줄이기는커녕 기록은 하염없이 밀리기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랬다. 뭐든지 초반에는 항상 기대 이상으로 잘한다. 하지만 연습하고 노력할수록 실력은 줄어들어 종전에는 평균을 한참 밑도는 실력으로 포기하고 만다. 이제 이런 현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달리기까지 포기했다간 앞으로는 영원히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비웠다. 멋모르고 10km를 몸이 부서져라 뛴 처음의 나는 환상에 불과하다. 58분이 아니라 580분이 걸리더라도 멈추지만 말자. 그만두지만 말자. 그렇게 속도를 늦췄다. 기록이나 페이스 같은 것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늘 뛸 거리만 정한채 정말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벤치, 내동댕이 쳐진 자전거, 킥보드들 사이로 풀이 돋아나고 들꽃이 폈다. 아마 저것들을 사용하려면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앉을자리에는 식물이 돋아났고 쇠에는 녹이 슬었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싶다.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는 사회적 공산품들은 식물들과 꽤나 잘 어울렸다.
하천에는 새들이 가득하다. 다른 새들은 무리 지어 다니는데 유독 왜가리 같은 커다란 새들은 혼자 활동한다. 먹이를 찾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혼자 멍하니 허공을 바라만 보고 있다. 왜 저 새는 항상 혼자 있을까.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저 행동 양식이 단독 생활일 뿐일 텐데, 습관처럼 홀로 있는 새를 내 감정의 표상으로 삼고야 만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멀리 보이는 산맥은 신기할 정도로 그 입체감을 상실한다. 해가 그 뒤로 몸을 숨겨 산 위로 주황색 빛만을 겨우 내비칠 정도가 되면, 마침내 산맥은 입체감을 완전히 잃어 종이 위에 칠한 까만 평면이 된다.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산은 영화 13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곳도 가짜 같다. 내가 세상의 끝에 서있는 것 같다. 딱 여기까지가 너에게 허용된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낮에는 햇빛, 밤에는 교량에서 비추는 조명을 받은 하천의 물빛은 신비한 물결들을 보여준다. 본래 예술작품들의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물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 시각 프레임에 들어오는 물은 사뭇 달랐다. 물결이 여러 개다.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군데군데 무작위 모양으로 다른 물결을 형성한다. 그렇게 달라진 물결은 그 색조차 달라 보이게 만든다. 한 흐름으로만 흘러야 할 것 같던 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색으로, 다르게 흘러간다. 상식을 위반하는 부조리함은 정말 자연스럽다.
교량에 설치된 형형색색의 조명은 어두운 하천을 환하게 비춘다. 검은색이었던 물빛은 노란색이었다가 파란색이었다가 교량의 빛나는 구조물을 반사한다. 낮에는 반으로 잘려나간 8 자 모양 같았던 구조물은 밤이 되어 물을 만나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한다. 다채로워진 물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배경 역할을 해준다. muse, arctic monkeys, my chemical romance, the smile 같은 밴드의 노래는 더욱 심장을 뛰게 만들어주고, the volunteers, sunset rollercoaster, tuesday beach club 같은 밴드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느린 비트이지만 대신 내가 뛰고 있는 곳을 좀 더 멋진 곳으로 바꿔준다. 높낮이가 다른 하얀색 조명들은 물에 반사되어 이퀄라이저를 형성한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가 뱅글뱅글 돈다.
하천 반대편 커다란 건물들에는 네모난 창문에서 비치는 노란색 불들이 가득하다. 군데군데 빨간색 조명이 작지만 밝게 빛난다. 아마 비행 물체를 위한 식별 신호 같은 것들이겠지. 두 색의 모양을 잘 조합해 내면 나에게 말하는 신호를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문득 트랙에 있는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멈춰 선다. 개구리 한 마리가 멀뚱히 서있다. 방금 자신이 밟혀 죽을뻔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건지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허공을 보고 있다. 개구리를 바라보다 문득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핸들을 붙잡고 있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명절이나 기일이 되면 혼자 차를 타고 산소를 향한다. 운전이 너무 무서워 출퇴근 외에는 자동차 근처에도 가지 않지만 이럴 때에는 예외다. 가족 내 유일한 차량 보유자이자 장남이라는 타이틀은 '운전이 너무 무섭다'라는 핑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 수 없이 해가 뜨지 않는 새벽부터 벌벌 떨며 고속도로를 밟아야 한다. 보조석에는 선생님이 부적이라며 주셨던 작은 강아지 인형이 탔다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면서 끝내 자식과 술 한 잔 못했던 당신을 위한 전통주가 탔다가, 결국 불안, 공포, 외로움 같은 것들이 모든 자리를 차지해 아무도 탈 수 없게 된다. 자리를 메운 불청객이 한마디를 건넨다 '그렇게 무서우면 그냥 다 그만두지 그래?'. 나는 아직 그 무엇보다 죽는 것이 가장 무서워 식은땀에 푹 젖은 손으로 핸들을 더 세게 붙잡는다. 어쩌면 저 개구리도 중요한 곳에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냇가에 묻어 빗물에 휩쓸려가버린 엄마 개구리의 산소라던지.
점점 숨이 점점 벅차오른다. 이렇게까지 숨이 가빠지면 안 된다. 유산소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뛰어야 한다. 혼잣말이라도 내뱉어보려고 하지만 나오는 건 가쁜 숨뿐이다. 맥베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니'. 그러니까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어지는 가슴이 터져버리기 전에.
그래 비탄이다. 이 탄식은 말을 하지 못해 새어 나온 슬픔이다. 주변 사람들의 호의를 믿지 못해 외면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쉬지 않고 내달린 자학의 레이스 끝에 마주한 완전한 외로움이다. 그러니 차라리 터져버리는 것이 좋겠다. 한 달음에 몸을, 두 달음에 마음을, 세 달음에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구간 기록 10, 구간 페이스 분당..."
귓가에 들리는 안내 음성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자세, 심박수, 페이스 모두 엉망이다. 이러면 안 되지. 이런 식으로 뛰면 목표 거리를 달성할 수 없다. 속도를 늦추고, 제멋대로 휘적거리는 팔다리를 다시 정렬하고 천천히 숨을 고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상념은 휘발되고 두 발이 땅을 박차는 소리만 남는다. 그러고 보니 뭔가 잔뜩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뭔가 질문에 답해보려 했는데... 아 그렇지.
내가 왜 뛰고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