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의 편집실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 대하여

by 후현

일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봐야 한다며 처음 듣는 스페인 감독을 추천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에릭 로메르 감독을 잘 몰랐기에 호나스 트루에바라는 낯선 이름 역시 머릿속에서 금세 잊혔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을 아주 감명 깊게 본 후 잊고 지냈던 감독의 이름을 떠올렸다. 현대의 에릭 로메르 스타일의 감독은 어떤 영화를 찍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보게 되었다.

보고 난 후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영화지? 어디까지가 영화고 어디까지가 영화 속 영화지? 왜 이런 식으로 연출했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중 가장 의아했던 건 이 영화 전반에 깔린 어떤 슬픔 혹은 우울이었다. 서사 자체는 커플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다시 사랑을 찾아가는 흔한 재결합 코미디 장르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런 간결한 서사로는 도저히 내가 느낀 감정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씨네필도 아닌 내가 '영화'와 '영화 속 영화'를 한데 뒤섞은 호나스 트루에바의 연출 의도를 해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대신, 알레가 되어보기로 했다. 편집실에 앉아 자신의 이별 과정을 직접 편집하는 알레의 감정을 쫓아가보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우울의 단초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스포일러 주의


영화감독 알레한드로(알레)와 배우 알렉스는 14년 차 커플이다. 둘은 긴 연애 끝에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알레의 아버지가 주장했던 '만남보다는 이별을 기념해야 한다'는 이론에 따라 이별 파티를 열기로 한다.

알레는 처음부터 이별 파티의 영화화를 선언한다. 현실에서는 별로겠지만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의 말투에서는 영화화의 기대감보다는 현실에 대한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욱이 영화로 만들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슬픈 현실을 영화로 만들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별도 파티를 열면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처럼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알레와 알렉스의 현실은 둘이 찍는 영화와 한데 뒤섞여 그 경계를 알 수 없어지게 된다. 알레는 정말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다가갔을까? 바깥을 보며 폭풍우를 예견했을까? 알렉스는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을까? 아니면 이 시퀀스가 전부 꿈이었을까? 혹은 꿈처럼 알레가 연출한 장면일까? 알 수 없다. 트루에바 감독의 영화는 이미 알레와 알렉스의 현실과 그들의 영화를 거울처럼 서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스크린 프레임에 놓인 알레와 알렉스의 현실인지, 그들이 찍은 영화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인지 구별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음날 아침부터 알레의 편집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알레와 알렉스를 철저히 단절시킨다. 분명 같은 집 안에서 비슷한 동선을 밟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 분할 화면, 시간차, 내부 프레임을 활용하여 마치 둘을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만든다. 둘을 어렴풋이 이어 주는 건 프레임 바깥에 희미하게 울리는 생활소음뿐이다. 그들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하나의 프레임이 갇히고 나서야 거실이 너무 좁다고 불평하며 대화가 시작된다.

편집실 장면부터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알레가 편집 중인 영화와 구분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이전에 이미 봤던 알렉스가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알레의 편집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존 장면은 알렉스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고 중간에 버스가 지나간 뒤 알렉스의 심정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마을의 전경이 나타난다. 그리고 촬영분에는 알렉스가 미술학원에 들어가 선생님과 인사하고 자리로 가서 앉는 장면까지 찍혀있다. 알레는 이 장면을 보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버스가 지나감과 동시에 와이프 전환으로 시작하도록 바꾸고, 미술학원 문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장면은 톤이 이상하여 이 부분을 잘라내고 바로 자리에 가서 앉는 장면으로 전환한다.

앞자리에 앉은 수강생 그라시엘라는 헤어진 남편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려 한다. 이미 잃어버린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붙잡아두고 싶어 한다. 그 뒷자리의 알렉스 역시 연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1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오는 동안 이 얼굴을 잃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상화가 완성되어 가는 지금, 알렉스는 곧 이별할 알레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알렉스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완성되지 않는 그림을 거꾸로 뒤집는다. 비로소 헤어지는 연인의 얼굴이 아닌 선과 면의 배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알레의 편집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관계를 이리저리 편집하여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알레의 친구 페르는 알레의 아버지가 말한 것들을 기억해 낸다. 베리만과 리브 울만, 문이 있고 원, 하트, 십자(X) 표시가 그날그날 다르고, 마지막에는 전부 하트. 실제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리브 울만은 오랜 기간 동거하여 딸까지 낳았다. 울만은 베리만 집의 서재에 좋은 날이면 하트, 슬픈 날이면 십자로 그날의 상태를 표시해두었다고 한다. 둘은 결국 이별했지만 창작적 협업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알레의 아버지가 이별을 기념해야 한다며 베리만과 울만을 이야기했던 건 그들이 헤어졌음에도 계속 함께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따라 어린 알레도 문에 그날그날의 기분을 표시했다. 좋은 날에는 하트, 좋지 않은 날에는 십자, 아마 이도저도 아닐 때는 동그라미를 그렸을 것이다. 기쁨과 슬픔과 아무렇지도 않은 날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좋은 날만 반복되기 시작했다. 영화도 그럴 수 있을까? 장면 하나하나가 좋거나 나쁠 수 있지만, 몽타주로 이어 붙이면 전부 하트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알레와 알렉스의 관계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반복하다 보면 마지막엔 결국 행복만이 남을 수 있을까?

알레는 집에 돌아와 알렉스에게 페르를 만난 이야기를 한다. 알렉스가 알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스키 잔을 받는 순간 화면에 좌우반전이 이루어진다. 편집이 튄 것 같지만, 뒤편의 액자 프레임을 보면 좌우반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알레는 알렉스가 위스키잔을 받는 지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알레는 알렉스에게 페르와 있었던 이별 파티, 베리만과 울만, 타로 카드 등의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알렉스는 이에 대한 별 반응 없이 자기 할 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좌우반전이 일어난 저 지점이 정확히 알렉스가 호세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이다. 소통의 어긋남이 편집 중인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만약 영화의 장면들을 베리만과 울만처럼 표시할 수 있다면, 아마 알레는 이 장면에 크게 십자표시를 그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통화로 어머니에게 이별 사실을 알린다. 통화 초반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 같을 때의 알렉스 뒤에는 유인원들이 보인다. 하지만 전화가 이어질수록 알렉스는 인류 진화의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마침내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는 온전한 개체가 아닌 두개골들 앞에 서있다. 이성적이었다가 점점 쇠퇴하여 마지막에는 감정밖에 남지 않은 통화 내용이 인류의 쇠퇴와 조응한다.

그리고 통화 중간 어머니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점프컷이 여러 번 일어난다. 알레는 이 장면을 모두 보여주기에는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프컷들이 오직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의도로 쓰였다고 보기엔 어딘가 조악하다. 도리어 보기 싫은 장면을 5초씩 빨리 감기로 넘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점프컷에는 리듬감을 살리려는 감독의 의도와, 장면을 넘겨버리고 싶어 하는 알렉스의 연인의 감정이 동시에 담긴다.

알레는 알렉스를 대신하여 어머니에게 이별 사실을 설득한다. 자신은 도저히 어찌할지 모르겠는 문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알레의 모습이 그에게는 마치 블록버스터를 진두지휘하는 제임스 카메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와인잔을 건네주고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느린 클로즈업으로 자세히 들여다본다. 양 옆 창에 비치는 앞모습과 뒷모습, 와인잔과 전화기를 들고 있는 햇살 아래 서있는 빛나는 옆모습.

어머니와 통화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스, 악몽에 시달리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알렉스를 본 알레는 편집을 동료의 손에 맡긴 채 화면의 초점에서 벗어나있다. 그녀가 본 장면은, 지금까지 나온 장면들과는 다르게, 분명 자신을 향한 애정이었기에 그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편집 대신 악몽 이야기를 한다. 촬영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문 틈 사이에 끼어있었다. 알레는 고양이를 내보내려 했지만 촬영장 사람들이 그걸 말리는 이상한 꿈이었다. 알레는 행복해지려면 이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알레와 알렉스가 떨어져야만 그 사이에 끼인 고양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둘은 떨어져선 안된다고 말한다.

동료는 알레의 꿈 이야기에 대꾸하지 않고 음악에 대해 묻는다. 다음 장면까지 음악이 이어지려면 너무 갑작스러우면 안 된다고 말한다. 배경음악이었던 음악이 알렉스가 핸드폰을 이용해서 튼 영화 속 음악으로 바뀐다. 그리고 알레가 버스를 탄 장면으로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배경음악이 된다. 알레는 오빠와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있다.

자신이 말한 이론에 따라 이별 파티를 열 계획이라는 알레의 말에 아버지는 매우 당황해한다. 이 장면에서 알레의 옆에는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그녀는 아직 이별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정리하기 매우 어려워 보인다. 반면, 이미 삶에서 많은 이별을 겪은 아버지의 옆에는 신문지로 덮어놓은 빠에야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물론 그 음식 역시 자신이 아닌 자식들을 위해 요리한 것이다.

딸의 이별 소식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별안간 3권의 책을 건네준다. 키르케고르의 <반복>, 카벨의 <영화는 우리를 개선할 수 있을까?>, <행복의 추구>이다. <반복>은 아름다운 과거를 붙드는 회상의 사랑보다, 현재와 미래에서 다시 살아내는 반복의 사랑이 더 참된 사랑임을 주장한다. 카벨은 1930~4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 중 이미 헤어졌거나 멀어진 커플이 다시 서로를 재인식/결합하는 영화들을 '재결합 코미디'라는 하나의 장르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영화가 사람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와 카벨을 합쳐보자. 영화를 통해 관계를 재인식/결합할 수 있다. 그 영화는 반복의 형식을 띠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알레의 영화는 어떤가. 사람들에게 이별을 알리고,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고, 이별 파티에 초대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계속 이렇게 반복해 나간다면 참된 사랑이 화면에 담길 수 있을까? 관계는 참된 사랑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알렉스가 사이먼과 함께 바를 방문한다. 이 장면부터 편집이 더욱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알렉스, 사이먼, 직원 3명이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릴 때 나는 종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장면에서 알렉스와 사이먼이 바에 들어와 직원과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면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분명 아버지가 건넨 책은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는 반복의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편집은 과거로 회상하기 시작한다.

친구 부부를 만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알레와 알렉스는 오랜만에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아파트와 관련된 이야기로 의견이 어긋나고 감정이 상하자 이들은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해 오른쪽 끝에 있는 문 앞에 도착한다. 화면 구성뿐 아니라 인물의 동선까지 거꾸로 회상하기 시작한다.

1차 시연본은 결국 이별은 하되 이별 파티는 하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일부는 영화에 여러 비판을 제기한다. 반복이 너무 많다. 순환적인 영화는 담론 중심, 선형적 영화는 발견과 불확실성을 다루는데 이 영화는 둘 다 아닌 것 같다. 이러한 평가는 키르케고르의 책과 전면으로 배치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반복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말하므로 서사로 따지자면 선형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데 반복을 반복한 영화의 서사 구조가 그 선형성을 잃은 것이다. 그 결과 관객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남자 둘은 의아함을 어필했고, 나머지는 평가를 거부한 채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자리를 떴다. 지금의 편집본은 어딘가 잘못됐다. 지금의 반복은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엔딩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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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촬영이 개시된다. 이제부터 나올 알레의 영화는 더욱 편집이 안된 날것으로 나온다. 장면 전환 후 등장하는 알레는 분명하게 영화의 등장인물이 아닌 감독이다. 카메라는 몸을 돌려 사라지는 알레로부터 급격하게 회전한 뒤 구도를 잡기 위해 분주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카메라의 줌 인/아웃하는 소리까지 그대로 들린다. 그리고 이전에 너무 갑작스럽게 들리면 안 된다고 했던 그 음악이 이번엔 그야말로 너무 갑작스럽게 배경음악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카메라와 음악이 세팅되고 나서야 배우 알렉스가 화면에 등장한다.

둘은 세트로만 파는 중고 의자를 함께 구매한다. 구매한 의자에 앉아 함께 베리만 타로점을 보기 시작한다.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과거는 '기억', 현재는 '수평', 미래는 '날아오르는'이 나온다. 자꾸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듯한 영화의 편집이 평행선을 달리는 둘의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둘은 타로 결과를 보고 다시 한번 이별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변경 전
변경 후

이후 나오는 장면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기존: 둘이 함께 무대를 확인 -> 알렉스가 알레의 초상화를 완성하여 보여줌 -> 둘이 함께 서재를 정리

알레는 리듬이 맞지 않다며 장면 순서를 변경한다.

변경: 알렉스는 친구와 케이터링 메뉴 선택 -> 알레는 친구들과 무대 준비 -> 둘이 떨어져 각자의 서재를 정리

확실히 리듬감은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순서를 변경한 몽타주 시퀀스는 이전보다 좀 더 리듬감 있게 이별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우선 바뀐 장면들을 보자. 모든 장면에서 알레와 알렉스가 분리되었다. 알렉스가 초상화를 건네주는 장면은 아예 삭제되었다. 기존 장면의 시퀀스를 다시 보자. 리듬감은 덜할지라도 둘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이별 파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납득이 갈 장면들뿐이다. 하지만 이 행복한 준비 과정에 얼마 못 가 균열이 생긴다. 알레가 알렉스를 위해 사인까지 받아 선물한 책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이 어긋남은 알레에게 지금까지의 편집이 둘의 관계와 맞지 않다는 것을 다시 인지시킨다. 이후 알레는 편집으로 둘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급격한 되감기로 무대 준비 장면에서 프레임에 잡혀선 안될 알렉스와 잔디깎이 기계를 잡고 있는 아버지까지 등장했고, 급격한 빨리 감기로 맞이한 9월 22일의 파티 분위기는 그야말로 결혼식이 됐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런 엔딩을 맞이했을 거라면 알레가 아닌 아버지가 메가폰을 들었을 것이다. 영화는 다시 이별 파티 전으로 돌아간다.


이별 파티를 준비하는 알레와 알렉스 위로 나레이션이 들린다.

"반복의 사랑은 유일하게 행복한 사랑이다. 그것은 기억의 사랑처럼 희망의 초조함이나 발견의 불안한 모험성이 배제되며 기억의 슬픔도 없다. 그 대신 반복의 사랑은 순간의 행복한 안정감이 있다."

알레의 영화는 반복의 사랑을 연출하려고 했다. 똑같은 집에서 일어나 일상 행위를 반복했고, 동료들에게,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너흰 다시 만날 거야'라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발견의 불안함은 배제되지 못했다. 미래로 향하는 선형성은 자꾸만 이별로 향하는 불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억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편집은 불안을 피해 자꾸만 행복했던 과거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반복은 영화를,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다. 모든 영화적 반복을 시도한 끝에 남은 거라곤 알렉스로 하여금 <반복>의 문구를 되뇌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이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알레는 결국 알렉스의 입을 직접 막아버린다. 이제 정말 이별 파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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