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이 판타지를 만든다면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에 대하여

by 후현

https://youtube.com/shorts/gzPGNx4UJvU?si=RHmph0J31iVRUQ1Q


위 영상은 최근 가장 재밌게 본 유튜브 영상에서 나온 쇼츠이다. 영상에서 힙합 프로듀서 허키님은 '나에 대해서 100% 까발리는 것 같아 취향 토크를 꺼린다'라고 말한다. 이를 듣고 민음사의 민경님은 비웃음을 참지 못한다. 댓글에는 '너 뭐 돼?', '자의식과잉', '이 ㅅㄱ 조금 모자른것 같은데' 등의 댓글이 달렸다. 오늘 쓰려는 영화가 나에게 딱 그렇다. 나에 대해서 너무 까발리는 것 같아 취향이라고 말하기 창피한 영화, 모자란 사람의 자의식과잉이 결국 글의 형태로 흘러넘쳤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펀치 드렁크 러브>를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 하나라고 밝히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의 폭력성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비현실적인 여성을 만들어낸 남성의 판타지 영화'라는 정의에 반박할 수 없었고, 나 역시 그런 남성임을 자백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은 타인의 취향에 대해 이 정도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은 단순히 최애 영화를 말하는 것을 숨겨야 할 내면을 드러내는 일로 치환하고 말았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고 관련된 글도 여럿 읽었다. 폭력적 판타지라는 영화의 오명을 벗기고 나 자신도 구하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지 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GRWqkzEqew


스포일러 주의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의 모든 요소는 배리의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카메라, 장면 구성, 음악, 색채 등 화면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기보다 배리의 감정에 적극 동조한다. 따라서 관객은 서사에 따라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불길한 리듬에 휩쓸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체감한다. 유운성 평론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는 설득하기보다는 감응시키려 한다.



초반부 장면부터 영화는 사건을 설명할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공고히 한다. 텅 빈 사무실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 사무적인 전화 통화와 사이사이의 긴 침묵, 배경 음악조차 없는 화면의 정적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난데없이 풍금이 등장한다. 사무실로 돌아간 배리에게 정적이 돌아오나 싶지만 이번에는 풍금 사이로 레나가 등장한다. 레나가 돌아간 후 풍금 앞에 선 배리에게 다시 한번 고요함이 찾아오지만 얼마 가지 않아 굉음과 함께 화물차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다음 장면에서 배리는 풍금을 들고뛰고 있다. 교통사고도, 풍금도, 레나도 무엇인지 알 길이 전혀 없다. 하지만 언제든 화면에 무언가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배리의 불안감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폰섹스 신에서는 카메라가 패닝으로 배리의 서성임을 쫓는다. 배리는 커튼을 치고 문을 잠그고도 불안을 해소하지 못해 움직임을 멈추지 못한다. 조지아가 연결되자 카메라는 더 큰 불안으로 배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쫓는다. 분명 원하는 데로 여자와 연결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굳은 표정, 흔들리는 화면, 주변 사물에 빼앗기는 초점까지, 화면에는 불안이 넘실거린다.


동생이 레나와 함께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도 카메라는 배리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쫓아다닌다. 덕분에 좁아진 시야는 프레임 바깥에서 발생하는 그 어떠한 사건에도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무실을 교대로 오고 가는 동생과 레나, 동생의 압박 질문, 조지아의 협박 전화, 부하 직원의 반복되는 질문, 화물차 사고까지. 관객은 순식간에 몰아치는 이 모든 일들을 오로지 배리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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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레나와의 데이트는 폭력으로 점철된다. 드디어 로맨스가 제대로 시작되나 싶던 순간 망치 사건이 언급되면서 배리는 급격히 분노한다. 식탁을 내리치려다 가까스로 멈춘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모든 기물을 때려 부순다. 배리와 레나는 종업원의 압박에 쫓겨 레스토랑을 빠져나온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때부터이다. 서로를 흘끗거리며 거리를 걷는 레나와 배리의 사이에는 분명 로맨스의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 다른 감정들도 있다. 화장실에서 저지른 폭력의 떨림과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분노, 레나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까지. 이 영화에서 폭력성은 로맨스를 방해할지언정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다. 대신 로맨스와 함께 화면에 떨림을 부여한다. 배리의 분노와 불안의 감정은 로맨스와 함께 화면을 진동시킨다.


영화의 색채 역시 배리의 감정을 대변한다. 흰색의 조명과 벽 위에 파란 옷의 배리가 있다. 파란색의 배리는 빨간 옷의 레나를 지속적으로 마주친다. 파랑과 빨강의 충돌은 옷에만 있지 않다. 배경에서, 주변 사물에서, 렌즈 내부 표면에서 반사되거나 산란되어 생긴 렌즈 플레어에서, 신과 신 사이를 잇는 색의 향연인 인터루드에서, 두 색은 서로를 마주한다. 하지만 두 색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기보다 서로를 침범, 오염시키려는 듯이 꿈틀거린다. 배리의 불안과 경계심이 제 색을 잃어버리길 거부한다. 하와이에서 재회한 둘이 키스하는 순간 마침내 두 사람의 색이 역광 아래 합쳐져 실루엣의 검은색이 된다. 배경에는 여전히 빨강과 파랑이 층을 이뤄 넘실거리고 있다.


그런데 배리는 왜 이렇게 불안해할까. 온 화면을 장악할 정도의 강렬한 분노는 대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걸까? 내 생각엔 이렇다. 배리는 자기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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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우리가 종종 혼용하는 창피함, 부끄러움, 죄책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뒤에 말한 3개의 단어는 주로 내가 한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창피함, 부끄러움,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고치려 한다. 하지만, 수치심은 '나'를 대상으로 한다. 특정 행위가 아닌 자아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보다 '그 일이 자기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라는 해석 하는 데에 치중한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행위가 아닌 나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결론은 보통 '내가 항상 그렇지', '이게 내 본성이다'와 같은 회피, 무기력,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수치심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자기 자신이 노출되며, 그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게 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아자체에 대한 평가는 자기 기준을 끊임없이 높아지게 하며, 한없이 높아진 자기 기준과 자아의 불일치는 더 큰 수치심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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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배리의 수치심과 평가에 대한 만성적 노출을 볼 수 있다. 어딜 가나 그의 머리 위에는 빛이 있다. 눈부신 태양광부터 사무실에서의 조명, 골목길에 가로등까지, 빛은 그가 어디에도 숨지 못하게 만든다. 그의 사무실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어항처럼 모두가 그를 볼 수 있다. 그가 가족 파티에서 연이어 깨부순 것도 커다란 유리창이었으며, 딘의 매트리스 가게 역시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생이 파티에서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하자 배리는 '모두가 나만 쳐다볼 거야'라고 말한다. 치과 의사인 형부에게 '가끔 제 자신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형부는 '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묻는다. 배리는 이미 형부의 질문에 대답했다. 배리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싫은 것이다.


이러한 배리의 반복되는 노출은 자기 기준을 높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멋진 수트를 입은 성공한 사업의 CEO,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으며 헬스클럽으로 신체적 강인함도 놓치지 않는다. 여성을 대하는데 능숙하며 딱히 집착하지도 않는다. 매우 똑똑하여 기업 이벤트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이익을 챙긴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아는 것이 많아 타인의 잘못된 말이나 거짓말을 지적한다. 배리는 현대의 알파메일과 같은 완벽한 남성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홀로 입은 수트는 가족들의 비웃음을 산다. 그의 사업 아이템은 뚫어뻥 혹은 화장실 배관과 같은 것으로 남자다움, 멋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업은 아직 시작 단계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못하다. 레나를 능숙하게 대하는 척 하지만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만 자꾸 들키게 된다. 너무 외로워 폰섹스를 시도했다가 멍청하게 개인정보를 다 넘기고 협박까지 당하고 있다. 분명 기업 이벤트의 취약점을 간파했지만 확신도 없이 쌓여있는 푸딩산은 부끄럽기만 하다. DJ 저스티스가 맞는 말로 사람들의 자존심을 꺾는 걸 즐기지만, 정작 현실의 자신은 거짓말만 남발한다. 배리는 자신이 세운 모든 자기 기준에 매 순간 불일치에 이른다.


이렇게 치솟은 수치심은 분노와 폭력성으로 이어진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매여 책임 회피를 유도하며, 그 고통이 너무 커지면 방어 기제로서의 분노를 유발한다. 분노는 결국 수치심을 일으킨 대상에 대한 파괴적인 보복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대상의 분노 및 보복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대상의 반응은 수치심을 강화하게 할 확률이 매우 높다. 수치심과 분노는 나선을 그리며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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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가 가족 파티의 참가를 위해 문을 연 그 순간부터 모두가 그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게이 보이'라는 어렸을 적 별명부터 망치를 던져 유리를 깨부순 일, 웬 양복이냐며 옷을 지적당하고 비듬 샴푸를 쓰냐며 위생 상태를 지적당한다. 이미 있어 불필요한 케이크를 사 왔으며, 비듬이 많이 보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당한다. 잘못 말한 발음, 혹은 유행이라 생각했던 표현, 혹은 나름의 작은 말장난이 집요하게 파헤쳐진다. 친구를 소개받는 일에 극도로 긴장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공유되며, 이성과의 만남을 거절한 대가로 다시 한번 게이 보이가 된다. 극도의 수치심은 고통이 되어 폭력으로 발산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리창을 깨부순다. 이후 레나가 또다시 망치 사건을 언급했을 때는 화장실을 박살 낸다. 배리의 수치심과 분노는, 그의 전 생애 주기에 걸쳐, 나선을 그리며 순환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방법으로 '타인지향 공감(other-oriented empathy)'이 제시된다.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내가 지금 수치심으로 인한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다음으로 상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사실과, 상대가 무엇을 잃었다고 느끼는지 손상의 종류를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상대의 손상을 수습하는 행동을 수행한다. 가장 핵심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보다 타인을 인지하고 살피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다.


배리는 딘의 부하들로부터 두 번의 습격을 당한다. 첫 번째는 도망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림자에서, 조명에서, 픽업트럭에서 수치심은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두 번째 습격에서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이전처럼 픽업트럭의 유리창을 깨부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레나의 상처를 보았다. 습격한 무리를 처리한 직후에는 레나의 안부를 물었다. 딘과 통화할 때는 자신이 당한 일보다 레나가 상처 입은 것에 분노했다. 분노와 폭력은 여전하지만 이전과 여실히 달라 보이는 이유는, 그 기저가 나의 수치심에서 레나의 상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길었던 악순환이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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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폭력성은 로맨스에 기여하지 못한다. 레나가 배리에게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닌 다친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었다. 배리가 자신의 모든 수치심을 레나에게 드러냈을 때 비로소 "so here we go"라는 문장과 함께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영화 내내 불안과 폭력에 흔들렸던 카메라는 배리의 고백과 함께 안정을 찾는다. 제대로 된 음조차 내지 못했던 풍금은 배경 음악과 같은 음을 내기 시작한다.




영화에 이런저런 말들을 중언부언 붙여봤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면 전체에 넘실거리는 폭력성의 이유를 수치심에서 찾을 수 있을지언정, 그걸 온전히 감수해야 할 레나의 선택에는 설득력이 전혀 없다. 레나의 존재는 불가해하다. 감독의 전작 <매그놀리아>에서 고통스러운 이들의 삶에 갑자기 개구리비가 쏟아졌듯이, 배리의 세상에 풍금처럼 레나가 갑자기 등장했다. 둘의 공통점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배리가 가진 수치심의 굴레를 부수는 일을 가능하게 해 준 건 영화가 부여한 레나라는 기적이다. 현실에는 레나가 없다. 현실의 배리는 레나 없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참조]

- Tangney, June Price. "Constructive and destructive aspects of shame and guilt." (2001).

- Tangney, June Price, and Ronda L. Dearing. "Shame and guilt." Guilford press, (2003).

- Stanley, Timothy. "Punch-drunk masculinity." The Journal of Men’s Studies 14.2 (2007): 235-242.

- FortyFPS Productions. "Interview: Behind The Scenes With Robert Elswit." (2003).

- David Ansen, "Call Him Unhappy Gilmore." Newsweek, (2002).

- Luca Mongai, "Critique : Punch-Drunk Love" Critikat, (2023).

- Melissa Luna, "Exposing the Interior Through Sound in Uncut Gems and Punch-Drunk Lov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2025).

- King, Cubie. "Punch Drunk Love: The Budding of an Auteur." Senses of Cinema 35 (2005).

- Adam Buffery, "‘Punch-Drunk Love’: The Hilarity of Anxiety and Blossoming Love in Paul Thomas Anderson’s ‘art house Adam Sandler film’." Cinephilia & Beyond.

- 유운성, "가볍고 경쾌한 그러나 지독히 앤더슨적인 <펀치 드렁크 러브>." 씨네 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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