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돌을 찾아서>에 대하여 (2023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조이와 에블린이 돌이 되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악동뮤지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라는 노래에서는 ‘인간이라서 참 다행이야 돌덩어리로 태어났다면 이리저리 치이고 굴러 떼굴떼굴 떨어지고 말 텐데 ‘라는 가사가 나온다. 여기서의 돌은 희귀하거나, 유용하거나, 정말 예쁘거나 하는 그런 돌이 아니다. 지천에 널려있고, 쓸모없고 볼품없어 보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더 나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미지의 표상이다. 온갖 스트레스에 지친 사람들에게 있어 ‘차라리 그냥 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은 꽤나 자주 해본 상상일 것이다.
영화 <돌을 찾아서>의 돌은 크게 두 가지의 부재를 나타낸다. 첫 번째는 효용성(utility, 쓸모나 보람이 있는 성질)이다. 주인공이 영화 초반 찾아다니던 돌은 과거에 성을 짓는 데 사용되었던 돌이다. 즉, 과거에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나 지금은 버려져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는 돌이다. 주인공이 강가에서 관심을 가지던 돌은 스스로 설 수 있는 둥근돌이다. 분명 특별하고 멋진 능력이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필요 없는 기능이다. 결국 그녀가 찾는 것은 스스로의 효용성이다. 영화 초반 할아버지가 주인공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을 때 일 때문에 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일 때문에 오지 않았다. 옛 성터의 돌을 찾는 정체불명의 직업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 핑계를 댄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효용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좀 더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관계의 부재다.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이상 관계는 피할 수 없다. 관계는 기쁨과 행복, 삶의 이유까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불편함, 피로함, 두려움, 공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은 그렇지 않다. 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있거나 외력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닐 뿐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좋거나 나쁜 감정이 생겨날 자리가 없다. 그녀는 관계를 찾아다닌다. 용기 내 물었던 할아버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자신을 필요로 했던 아이들은 금세 곁을 떠났다. 물수제비를 잘하는 남자는 계속 곁에 머무려 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신체를 가진 남성은 나에게 어떠한 물리력을 행사할지 알 수 없다. 모든 관계는 불편하거나 허무하거나 두렵다.
이러한 관계를 화면의 심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화면에서 영화의 심도는 거리에 따라 전경, 중경, 후경으로 구분된다. 주로 영화의 포커스는 전경에 맞춰지며 후경은 배경의 역할을 한다. 관객은 후경보다는 주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전경에 더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 <돌을 찾아서>에서 후경은 전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후경에서 포커스도 잡히지 않은 공놀이하던 아이들은 전경에 있는 주인공을 후경으로 불러낸다. 심지어 주인공이 전경에서 중경까지 이동했을 때쯤 영화를 보는 관객과 후경에 있는 아이들 모두에게 동시에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연출되기도 한다. 물수제비를 하던 남자는 반대로 직접 후경에서 전경으로 침입한다. 남자의 앞 중경에는 꽤나 깊고 넓은 강이 있었지만, 남자는 거침없이 그 물을 건너 전경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전경에 주인공이 사라지면서 마치 남자가 갑자기 관객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관객은 이를 통해 갑작스럽게 발생한 관계가 주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체험한다.
앞서 말한 두 가지의 부재는 사실 하나이다. 효용성과 관계, 관계에서의 효용성. 스스로의 가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했을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단어는 불가분 하다. 결국 주인공이 찾는 것은 누군가가/집단이/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는 가이다. 효용성은 관계에서 오지만 관계는 두렵다. 관계는 효용성에서 비롯되나 나는 누군가가 필요로 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물수제비 남자와 주인공 여자 둘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한다. 물수제비, 돌 던지기, 돌탑 쌓기, 나뭇가지 옮기기. 이 놀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놀이 자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놀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단 하나의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관계와 효용성은 필요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생산물에 불과하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남자에게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원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답할 수 없다. '원하는 것'이 있고 거기서 관계와 필요성이 생산되어야 하지만, 이 둘이 원하는 것은 '관계'와 '필요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둘은 지독하게 외롭지만, 함께할 수 없다.
남자와 헤어진 여자는 깜빡 잠이 든 곳에서 우연히 강아지 산책을 맡는다. 불편하거나 불안한 사람은 없고 귀여운 강아지만 있다. 오늘의 산책당번을 수행함으로써 관계에서의 역할까지 수행해 냈다. 이전의 관계들에 비해서 훨씬 편안하다. 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다. 하루에 한 번뿐인 역할은 끝났고 옆에는 사람도 강아지도 남아있지 않다.
여자는 마을을 떠나면서 기차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다. 어제 만난 물수제비 남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여자의 돌을 찾고 있다. 여자는 관계의 불안과 두려움을 피해 이미 도망쳤다. 남자는 이미 주인이 사라진 돌을, 자신의 필요성을 찾아 물속을 분주히 헤집는다. 이 잠깐의 순간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잠깐이지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