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3 엄지공주
동화 속 나라의 다른 이름은 모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지요. 요정과 함께 하늘을 날 수도 있고,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깊은 굴속으로 뛰어들 수 도 있습니다. 마법사를 찾아 나선 모험에 리더가 되기도 하고, 사악한 마녀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상력과 모험심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동화 속 나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미모 하나만으로 스토리 전체를 날로 먹으려 하죠.
오늘의 주인공 원조 공주병 엄지공주를 만나보겠습니다.
<엄지공주>는 1835년 안데르센이 서른 살이 되었던 해에 출간한 두 번째 동화집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엄지공주>는 19세기의 귀족 여성에 대한 그만의 견해와 시선이 잘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의식이 누구보다 강했지만 사랑하는 대상 앞에선 극단적으로 나약했던 안데르센.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중상류층 여성과의 사랑이 얼마나 험난하고 허무한 길이었는지 이 한 편의 동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엄지공주처럼 동화 속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동화 주인공이 또 있을까요?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사랑받을 정도로 작고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을 빼곤, 작품 속 엄지공주는 놀라 울리만큼 존재감이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엘리스처럼 모험심이 강한 것도 아니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동료를 만들거나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않습니다. 작품 속 엄지공주는 주인공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토리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울며불며 그저 좋은 일이 생겨나기만을 기다립니다.
꽃 속에서 태어나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온실 안에 화초처럼 살아가던 엄지공주는 어느 날 두꺼비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집 밖을 나오게 됩니다. 이후 몰려오는 온갖 생명체들의 애정 러시로 뜻하지 않게 시련을 겪게 되죠. 바보 두꺼비의 신부가 되어 진흙탕 속에서 평생을 갇혀 살 뻔했다가, 두꺼비 소굴을 탈출하면서 폭포 밑으로 추락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풍뎅이에게 잡혀가 온갖 모욕을 겪는가 하면, 땅속 마을 두더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정된 삶을 사는가 싶더니, 또다시 앞 못 보는 부자 두더지에게 팔려갈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올 때마다 어디선가 의로운 생명들이 나타나 열과 성의를 다해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너무나 작고 연하다는 이유로 우리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동화 속인데도 말이죠. 이쯤 되면 답답해했을 만도 한데, 그러든 말든 안데르센은 엄지공주를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세를 한탄하며 울먹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엄지공주가 유일하게 한 일은 죽어가는 제비를 돌봐준 일었습니다. 엄지공주에게 땅속 마을에서 만난 병든 제비는 두더지 굴에서 탈출시켜 줄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엄지공주의 보살핌을 받아 건강을 되찾은 제비는 굴속을 빠져나가고 이듬해 엄지공주를 다시 찾아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여느 생명체들처럼 그 역시 연민을 느꼈겠지요. 제비는 엄지공주를 등에 태워 따뜻한 남쪽나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남쪽나라에 도착하기 무섭게 엄지공주는 꽃잎의 왕자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죠. 왕자에게 마야라는 새 이름도 얻고, 날개도 달고, 백년가약을 맺는 등 마치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이리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나 보다 하는 느낌으로 스토리는 엔딩으로 향합니다. 그렇게 엄지공주 혼자 호사를 누리는 동안 제비는 어디서 무엇하고 있었을까요? 언 듯 봐선 제비가 가장 불쌍해 보입니다만, 제일 불쌍한 이는 따로 있습니다. 함께 살 집을 짓던 두꺼비, 혼례를 준비하던 두더지, 은혜 갚은 제비 모두 불쌍하지만, 그중 생명을 바친, 아니 바쳐진 나비가 제일 불쌍합니다. 두꺼비집에서 탈출할 때, 연 잎에 자신의 몸을 묶어 가면서까지 엄지공주를 구해주려던 나비는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연잎과 함께 폭포수 밑으로 떨어져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필자가 어릴 적 읽었던 <엄지공주>는 이렇게 만난 꽃잎 왕자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무리할 안데르센이 아니죠? 원작의 엔딩은 조금 다릅니다. 제비는 덴마크로 날아와 어느 시인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끝을 맺데요, 시인은 필경 안데르센 자신일 것입니다. 그때 제비는 안데르센을 찾아가 뭐라 말했을까요? 작품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여자에게 잘해줄 필요 없더라. 죽을힘을 다해 따뜻한 남쪽나라까지 데리고 갔는데, 가자마자 딴 놈하고 눈 맞아서 도망가더라. 예쁜 것들은 역시....”
19세기가 되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이 전 유럽을 뒤엎었습니다. 크고 작은 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은 쇠퇴하고 공화정이 하나 둘 수립되기 시작했죠. 또한 산업혁명이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가속하게 됩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마침내 통일 국가가 되었고,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평화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문학에 다양성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선물은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건데요, 누구라도 성공하면 귀족 못지않은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꿈틀거리는 시작 했습니다.
이런 19세기 한가운데 안데르센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참담한 빈곤을 겪었지만 작가로 성공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하층민들과 교류하거나 사랑에 빠진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상류층을 향하고 있었고 오직 그들에만 사랑을 갈구하고 하였죠. 그에게 있어 상류층과의 결혼은 빈곤의 떼를 벗는 마지막 퍼즐이었습니다. 그러나 못생긴 외모와 서투른 연애기술로 유명 작가가 되어서도 연애관계에 있어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전 유럽이 우러러보는 작가로 우뚝 선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비록 작가로서 성공하기 했으나, 이는 결코 그가 바라던 종착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귀족과 같은 상류층이 되길 바랐지만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는 죽는 날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엄지공주>는 섬세한 묘사와 담백함 흐름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유독 그의 작품답지 않게 스토리가 밋밋하기 짝이 없습니다. <엄지공주>에는 작가 자신이 겪은 귀족 여성에 대한 이러지도 저러저도 못할 애증이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관통한 수많은 여성 중에 엄지공주의 주인공으로 한 사람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론 스웨덴의 인기가수인 예니 린드를 꼽고 싶네요. 안데르센은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주변만 맴돌 뿐,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정식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더랍니다. 프러포즈 대신 홍보대사를 자처하고 나서 그녀가 유럽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도록 밑거름이 되어주었던 그의 행동은 작품 속 제비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안데르센의 작품들은 창의성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 동화의 영역에서 당연시되던 계몽주의 올가미를 과감히 벗어던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 억지로 교훈을 심어주거나 기독교적 권선징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동화가 교육이라는 목적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비단 200여 년 전의 담론은 아닙니다. 여전히 아이가 읽을 동화를 선택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동화책을 집어 든 부모는 아이에게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혹여 지나친 상상으로 아이를 혼란에 빠트리지는 않을지 고민을 하곤 합니다. <엄지공주>에서 아동에게 전해줄 교훈은 딱히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교육적 가치에 치중하기보다 작품의 완성도와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감성 그대로를 표현하는 이러한 성향은 작품의 엔딩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흥미진진한 전개로 플롯을 따라오게 만들다가 작품의 말미에 불쑥 ‘나머지 이야기는 네가 알아서 해라.’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독자에게 넘기곤 하죠. 그렇다 보니 안데르센 작품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엔딩 피날레를 찾기 어렵습니다. 대신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긴 여운을 선사해주죠. <완두콩과 공주> 또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두고 교훈 동화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허영과 서세를 버려라.’라는 교훈이라기보다 ‘작금의 세태가 이렇지 않은가.’하는 풍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