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 2
1940년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작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독무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빅터 플레밍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 서 작품상 등 10개 부문을 휩쓸었고, 남우주연상을 비롯한 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오르는 등 미국 영화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죠. 그런데, 제12회 아카데미 기록을 훑다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이 하나 더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했고, 작품상에 노미네이트 됩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영화 '오즈의 마법사'입니다. 바람과 함께와 1939년 같은 해 만들어지고 또 1940년 같은 해에 아카데미의 레드카펫을 밟은 것 말고도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두 작품의 감독이 같다는 것입니다. 빅터 플레밍 감독(Victor Fleming)은 1939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오즈의 마법사' 두 가지 작품을 거의 동시에 개봉합니다. 당시 극장이라는 게 어른들 그것도 잘 갖춰 입고 가는 나름 고급의 문화 활동이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겨냥한 오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비해 사람들에게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전 세계 극장가를 들어다 놓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달리 오즈의 마법사는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길 정도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습니다.(280만 달러 투자, 300만 달러 수익)
그런데, 10여 년이 훌쩍 지난 뒤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1956년 추수감사절 명절에 CBS에서 처음 TV 전파를 타게 된 “오즈의 마법사”는 4,500만 명의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 모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방송에서 매우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오즈의 마법사는 60년대, 칼라 TV가 보급되면서 또 한 번 방송사들의 러브콜을 받게 됩니다. 칼라 티브이의 드라마틱한 색감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국마다 앞 다투어 이 영화를 송출하였고, 현재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방송국을 바꿔가며 60년 넘게 안방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60년대 할아버지, 80년대 엄마 아빠, 그리고 2000년대 자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신비한 마법 세상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죠. 칼라 티브이의 붐과 함께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방영한 영화 1위에 등극하게 됨은 물로 미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오즈의 마법사가 개봉하기 5년 전 이미 칼라 영화가 있었음에도 오즈의 마법사가 칼라 영화 시대를 열은 작품이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이는 최초의 칼라 영화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화 초반 세피아톤 단색으로 시작해서 도로시가 오즈에 도착하면서 칼라로 바뀌는데, 이러한 극적인 표현 때문에 붙여진 일종의 별명입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동화를 유성 영화화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최초의 어린이 뮤지컬 영화이며,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등 소화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들도 당대 명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지금까지도 동화를 원작으로 한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스토리 진행이 빠르고, 오즈의 이곳저곳을 섬세하게 스크린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러닝타임 내내 지루할 틈이 없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기에 충분했죠.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종이로 출간된 문학작품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기는 건 실제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글로 작품을 접하는 사람은 상상력이라는 무한한 동력으로 작품 속 세상을 그려냅니다. 그러나 영상물은 여러 가지 정형화된 틀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수 아이템인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원작 동화들은 스크린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인어공주처럼 엔딩이 바뀌기도 하고, 말레피센트처럼 주인공이 바뀌는가 하면, 어린 왕자처럼 시대와 배경을 바뀌기도 합니다. 때때로 겨울왕국처럼 원작을 유추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스토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오즈의 마법사'는 원작의 스토리를 잘 따라가는 원작 중심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스토리나 연출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점이 원작과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즈에 도착 후 당황하는 도로시 앞에 착한 마녀가 나타납니다. 착한 마녀는 집에 깔려 죽은 동쪽마녀가 신고 있던 구두를 도로시에게 건네주며 노란 벽돌 길을 따라 에메랄드 시티로 가라고 알려주죠. 어려가지 일을 겪고 난 후 실체가 드러난 마법사와 함께 열기구를 타고 캔자스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만 열기구를 놓치게 됩니다. 절망하던 도로시 앞에 다시 착한 마녀가 나타납니다. 그리곤 구두 뒤 굽을 세 번 두드리면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도로시는 즉시 이것을 실행하고 다시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 이모와 삼촌을 만나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처음부터 구두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려주면 될 것을 왜 생고생을 시키면서 도로시를 에메랄드 시티로 보낸 걸까요? 원작과 차이에서 빚져진 오류입니다. 영화에선 오즈로 가라고 알려준 마녀와 집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준 마녀가 동일인데, 원작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처음에 나타나 오즈로 가라고 알려준 마녀는 착한 북쪽마녀입니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나타나 집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준 이는 착한 남쪽 마녀입니다.
요약하면 구두의 순간이동능력은 처음에 만났던 북쪽 마녀는 모르고 남쪽 마녀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는 남쪽 마녀를 찾아가는 모험담이 통째로 편집되었습니다. 서쪽 마녀를 잡으러 가는 길에 모험담을 충분히 들려줬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렇게 북쪽마녀와 남쪽 마녀는 영화에서 한 사람이 됩니다.
도로시는 오즈로 내려오는 과정에 못된 동쪽마녀를 죽이게 되고 전리품으로 붉은색 구두를 얻게 됩니다. 이 구두는 스토리 전계와 결말에 핵심 역할을 하게 되죠. 그래서일까요? 훗날 뒤꿈치를 세 번 맞부딪히면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는 이 빨간 구두는 첫 경매 때 경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합니다. 현재 4켤레나 전해지고 있음에도 한 개의 가격이 11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 구두 한 켤레만으로도 도로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20억을 호가하는 도로시의 원피스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지만요. 그런데, 이 구두도 원작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색상인데요, 원래는 붉은색이 아닌 은색입니다.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바꾼 것이죠.
Over the rainbow
설령 동화와 영화는 모른다 해도 아마 이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화 초반 도로시 역을 맡은 주디 갈랜드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곡은 미국서 가장 많은 가수들에게 커버되었던 곡이기도 하고, 각종 경연대회나 콘서트장에서 자신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 부르는 감초 같은 곡입니다. 록, 클래식, 팝, 포크 등 다양한 장르에서 100년 가까이 사랑받아왔고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가수의 입을 통해 불리어질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곡입니다. 특히나 미국에서 성적 소수자(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도 하는데요, 이유는 무지개가 성소수자의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Ding dong! the withch is dead!
이 노래는 동쪽 마녀가 도로시에 집에 깔려 죽자 먼치킨들이 축하의 의미를 담아 부르던 노래입니다. 오즈의 마법 사하면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노래는 아마도 앞서 소개해드렸던 오버 더 레인보우일 텐데요. 2013년 4월 영국에서 'ding dong! the withch is dead!‘가 각종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수상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의 전 수상인 마가렛 대처가 사망하자 적대관계에 있던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대처의 사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SNS 등지에서는 이 노래를 차트에 올리자는 운동이 벌어졌고 실제로 1주일 만에 5만 장 넘게 팔리면서 UK 차트 2위까지 치고 올라가게 됩니다. BBC의 주간 음반 차트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진짜로 틀어야 하는가를 놓고 꽤 큰 설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도로시 역할에 주인공인 주디 갈란드가 낙점된 데는 순전히 감독인 빅터 플레밍의 선견지명 덕분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제작사 MGM은 영화 ‘하이디’로 이미 미국의 국민요정이었던 셜리 템플(Shirley Jane Temple, 1928.4.23 ~ 2014. 2. 10)을 도로시로 낙점하고 있었는데, 거친 캔자스 소녀 이미지를 원했던 감독의 주장으로 지금의 주디 갈란드가 캐스팅되죠. 우리에겐 도로시 = 주디 갈란드라는 공식이 있지만, 미국에선 1955년 스타 탄생의 주인공으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녀는 스크린과 콘서트 그리고 뮤지컬을 넘나드는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건 토크쇼가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녀를 가수 겸 국민배우로 만들어준 첫 도약대는 ‘오즈의 마법사’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 고향과 같은 영화일 텐데요. 어쩐 일인지 오즈의 마법사를 촬영하던 그 시절 이야기를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언젠가는 그 무렵이 배우로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죠. 16살 소녀에게 촬영 기간 2년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주디 역시 몸은 커지고 보다 성인 여성다워졌으며, 모든 청소년들이 겪듯이 정신적인 고뇌와 갈등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던 영화사는 주인공의 그런 고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촬영장 안 밖에서 어린 주인공을 혹사시킬 뿐 별다른 배려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소녀를 연출해야 한다며 그녀의 가슴을 천으로 꽁꽁 싸맸으며, 살이 찌지 않도록 하루 4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게 했음은 물론 촬영 일정을 맞추기 위해 필로폰과 수면제를 번갈아주며 엄청난 혹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촬영 기간 내내 조연들의 시기와 질투가 계속됐고, 감독인 빅터 플레밍 조차 촬영장에서 손지검을 하는 등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항상 함께 했지만, 어머니의 잘못된 자식바라기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서커스 조련사를 자처하며 누구보다 그녀를 괴롭힌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신 넘치는 연기와 달리 평범한 외모 때문에 자존감이 낮았던 그녀는 양다리를 걸쳤던 첫사랑을 다른 배우에게 뺏기고, 어머니에 의해 강제 낙태를 당하는 등 무대 뒤 참혹한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니와도 갈라서고 배우와 가수 그리고 방송인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지만, 어린 시절 길들여진 약물중독과 우울증은 계속 그녀를 쫓아다니며 괴롭혔습니다. 5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1969년 약물중독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 마흔일곱이었으며, 그녀가 죽던 날 캔자스에 큰 토네이도가 일었다고 합니다.
워낙 명 연기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라 일일이 다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딱 두 분만 더 모셔보겠습니다.
마가렛 해밀턴 (Margaret Hamilton : 1902.12.9. ~ 1985.5.16.)
AFI가 선정한 할리우드 영화의 4대 악당에서 양들의 침묵의 닥터 하니발,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와 함께 서쪽의 녹색 마녀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깜장 드레스와 고깔모자를 하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녹색의 이 이름 없는 마녀는 영화 이후 못된 마녀의 상징이 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나 해리포터 등을 예로 들지 않아도, 미국 어린이들에게 마녀를 그려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빗자루를 탄 녹색 마녀를 그려낼 정도로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가 되어버렸죠. 100년 가까이 넘사벽의 포스를 자랑하는 이 강렬한 캐릭터의 연기자는 마가렛 해밀턴 (Margaret Hamilton : 1902.12.9. ~ 1985.5.16.)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편집된 캐릭터라고 하는데, 시사회 후 어린이들이 너무 겁에 질려했다는 이유로 무려 절반 가까이 삭제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 얼굴과 과하게 큰 코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에게 강하게 각인되게 됩니다. 물론 오버스럽면서도 능청맞은 연기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요. 이 영화 이후 미국의 대표 마녀가 된 해밀턴은 한 평생 악인 전문 배우로 살게 됩니다. 당시 어린이들이 얼마나 무서워했냐면, 미국의 뽀뽀뽀라 불리는 세사미 스트리트에 마녀 복장을 하고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통 편집이 된 적도 있을 정도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아이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그녀는 맡은 배역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배우였습니다. 원래 유치원 교사 출신이었던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스스로 이 멋진 영화에서 배역을 맡기 위해 개런티를 낮춰가며 오디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주디 갈랜드가 촬영장에서 힘겨워할 때 위로해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그녀의 실제 성격이 알려지지 시작했는데요, 집에 와서도 지워지지 않던 두꺼운 노색 염료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는 그녀는 영화에서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장면을 촬영하다 얼굴과 손에 불이 붙으면서 몇 주를 병원에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만에 녹색 장갑을 끼고 촬영장에 나타날 정도로 배역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이후 주연으로 출연하거나 주목받은 작품은 없었지만,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에 악역과 단역으로 꿋꿋이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 출간된 걸 크러시(페넬로프 바지 외, 2018) 1편에서 그녀의 삶을 재조명하기도 했습니다.
배우 프랭크 모건(Frank Morgan : 1890.6.1.~1949.9.18)
당시 영화 포스터에 보면 누구보다 얼굴이 큼직하게 나온 이 배우 기억하지요? 오즈의 마법사로 나온 바로 그 배우입니다.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영화 초반에 등장한 가짜 마술사 마블 박사라는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배역 3개를 더 맞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배우 프랭크 모건(Frank Morgan : 1890.6.1.~1949.9.18)은 오즈의 마법사와 마블 박사 그리고, 에멜 라드 시티 문지기와 마부 그리고 마법 사방의 문지기까지 무려 5개의 배역을 소화해 냅니다. 씬 스틸하는 장면은 없지만 감쪽같은 연기 변신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배우입니다.
각종 포탈에서 영화 오즈의 마법사로 검색을 해보면 첫 페이지를 가득 메운 자살 괴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촬영장의 폭력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먼치킨으로 등장했던 배우들 중 한 명이 세트장에서 자살을 했고, 그 장면이 그대로 스크린에 노출되었다는 괴담인데요. 이런 루머는 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습니다. 90년 대 말, 인터넷 망을 타고 이러한 괴담이 또 한 번 회자되기 시작합니다. 제작사는 세트장 안에 있던 아프리카 학이 날개를 펼쳤다고 접는 모습이라며 괴담설을 일축했고 ‘세 남자와 아기바구니’(귀신 등장설, 알고 보니 등신대)나 ‘벤허’(스턴트맨이 마차에 깔려 죽었다. 조사해보니 죽은 배우 없다.)의 괴담처럼 그렇게 시청자 오해로 정리가 되는 듯싶었습니다. 그러던 2011년, 유튜브에서 초판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며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는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올린 이는 손수 비디오 테이프를 삽입하고 브라운관 TV 화면을 그대로 촬영하는 등 등 컴퓨터 합성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순식간에 세상은 또 한 번 오즈의 마법사 괴담설로 들썩였고, 자살한 사람까지 특정되는 등 마치 사실처럼 굳어져갔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 조작임이 드러났고, 자살했다는 배우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되면서 결국 괴담설이 시작된 유튜브 영상은 삭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담에도 떡밥은 있었습니다. 실제 촬영장에서 배우들의 처후가 거의 학대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도로시 역을 맡았던 주디 갈란드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먼치킨 역할을 맡은 배우들 역시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촬영 기간 내내 밤낮으로 혹사를 당했음은 물론 집단합숙소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이들이 받은 급여는 주당 50달러였으며, 토토 역을 맡았던 강아지의 주급은 125달러였다고 합니다.
1978년에는 “오즈”의 출연진이 모두 흑인으로 등장하는 뮤지컬 “위즈(Wiz)”가 만들어져, 뮤지컬작품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의 토니상을 휩쓸었습니다. 뮤지컬의 흥행을 발판삼아 1978년에는 동명의 뮤지컬영화가 제작되었는데요, 여기서 허수아비 역할을 맞는 배우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이클 잭슨입니다. 이 작품으로 오즈는 인종의 경계조차 넘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오즈의 후속작이나 프리퀄을 자처하는 많은 영화들이 발표되었고, 에니메이션과 드라나 등 서브컬쳐영역에서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습니다. 특히나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설정이나 등장인물을 빌려온 작품들이 많은 데요, 일일이 거론하는 게 무의미 할 정입니다. “오즈”는 기념일마다 방영되는 인기 있는 한 편의 고전영화로 머물기를 거부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여러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며 미국을 넘어 세계 대중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죠. 미국 국회도서관이 1989년에 영화 “오즈”를 중요한 문화적 기록물로 분류해 보관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오즈의 문화적, 역사적 영향력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