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은 은행원
대한은행 본점 영업부의 공기는 늘 무겁고 차가웠다.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와 오래된 지폐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맴돌았다. 창구 직원 박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귓바퀴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박의 초능력은 끔찍하게도 하향 평준화된 이 사회에서도 유독 지독한 부작용을 자랑했다. 그는 타인의 귓속말을 천둥소리처럼 거대하게 증폭해서 듣는 능력을 가졌다. 누군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거나 평범하게 대화하는 소리는 남들과 똑같이 들렸다. 하지만 입을 가리고 은밀하게 속삭이는 순간, 그 소리는 박의 고막을 찢고 뇌수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으로 변모했다.
[그림 설명]
차가운 대리석 카운터 너머로 단정한 정장을 입은 은행원이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하며 웅크려 있는 모습. 주변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오전 열한 시, 지점장실에서 최고 등급 고객을 응대하던 지점장이 밖으로 나왔다. 지점장은 살찐 배를 내밀며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고 얇은 입술은 비열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옆에 선 부지점장의 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숨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이번 부실 대출 건은 서류 조작해서 넘겨. 부지점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지점장님.
그 순간 창구에 앉아 있던 박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쩌렁쩌렁. 지점장과 부지점장의 은밀한 속삭임이 박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음으로 터져 나갔다. 잇몸이 덜덜 떨렸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 박은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고 콧잔등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비밀을 공유하려는 인간의 간사한 숨결이 그에게는 끔찍한 물리적 타격이었다.
오후 두 시, 평화롭던 은행에 파열음이 울렸다. 탕. 천장을 향해 발사된 공포탄 소리와 함께 화약 타는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쳤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삼인조 무장 강도였다. 다들 바닥에 엎드려. 강도의 우렁찬 고함이 대리석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고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하지만 박은 오히려 평온했다. 강도들의 우렁찬 고함은 박의 귀에 지극히 정상적인 볼륨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속삭이지 않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강도들이 차라리 부실 대출을 모의하는 지점장보다 천사처럼 느껴졌다. 박은 대리석 바닥에 엎드린 채 차가운 감촉을 즐기며 오랜만에 귓속의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보안 카메라를 박살 낸 강도들이 현금 수송 카트 뒤에 모여앉았다. 그리고 인질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게,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속삭이기 시작했다. 야 삼 번 금고 비밀번호 빨리 입력해. 저기 안경 쓴 지점장 놈한테 신호 보내라고. 그 순간 박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크아아아. 강도들의 귓속말이 박의 두개골 안에서 전투기 엔진 소리로 변해 폭주했다. 귀에서 삐 하는 강렬한 이명이 울렸고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박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던 지점장이 강도 두목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모기 소리만 하게 속삭인 것이다. 내가 알려준 비밀번호 육구칠사 누르고 빨리 돈이나 챙겨서 꺼져. 배당금은 나중에 나누자고. 지점장의 얼굴은 공포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탐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지점장이 꾸민 자작극이었다. 인질들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완벽한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박에게 그 속삭임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폭로였다. 육구칠사. 그 숫자가 고막을 강타하는 순간, 박은 끓어오르는 두통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미친 듯이 소리쳤다. 비밀번호가 육구칠사라고. 지점장이 너희들한테 가르쳐준 번호가 육구칠사 맞지. 은행 안의 모든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강도들의 복면 위로 당황한 눈빛이 교차했고, 지점장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며 하얗게 질려버렸다. 박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진실은 강도의 총소리보다 더 날카롭게 은행을 관통했다.
그날 자작극은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박은 은행을 구한 영웅이 되었고 윗선에서는 그를 최연소 지점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박은 넓고 푹신한 지점장실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 영업장에서는 수십 명의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입을 가리고 속삭이고 있었다. 저 인간 분명히 위에서 줄을 댄 거야. 운 좋게 한 자리 차지했네 재수 없어. 그들의 은밀하고 시기 어린 귓속말 수십 개가 거대한 우레와 번개가 되어 박의 고막을 쉴 새 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가죽 의자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귓속말의 지옥은 이제 막 가장 높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