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포용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하다.
이 말에 반대하기는 쉽지 않다.
포용은 듣기만 해도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진보적인 가치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자는 제안은 윤리적으로도 옳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자꾸 멈추게 된다.
포용은 언제부터 이렇게 자주 그리고 이렇게 안전하게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을까.
이것은 모두를 품겠다는 아름다운 단어 뒤에 숨어 책임과 예산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관료들의 우아한 화법을 마주하고 포용이라는 단어의 껍데기를 벗겨낸 어느 건조한 자문 회의실의 기록이다.
포용 도시를 선포합니다
시청 청사 내 대회의실.
김경훈은 장애인 정보 접근성 자문위원 자격으로 무장애 포용 도시 조성 사업 간담회에 참석 중이었다.
마이크 앞에서는 오늘 행사를 주관한 복지기획과의 박동진 국장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름기를 머금은 듯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여러분 우리 시는 이제 배제 없는 포용 도시로 나아갈 것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따뜻한 포용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 여러분의 많은 공감과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박 국장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김경훈의 옆에 앉은 보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발치에 엎드린 탱고는 회의실의 건조한 공기가 지루한지 바닥에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감각 사진]
시각을 배제한 회의실의 공감각적 기록.
청각. 관료의 입에서 쏟아지는 포용이라는 단어의 매끄러운 마찰음 그리고 참석자들이 영혼 없이 치는 박수 소리.
촉각. 무장애 도시를 논하는 회의실이지만 휠체어석이 없어 비좁게 배치된 임시 의자의 딱딱하고 차가운 질감.
후각. 갓 내린 종이컵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인스턴트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
이. 포용은 원래 진보적인 언어였다
김경훈은 하네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 포용 담론은 처음부터 문제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출발은 인권의 역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제이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학살과 우생학에 대한 반성 속에서 국제사회는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때 포용은 누군가를 사회 밖으로 밀어내지 말자는 도덕적 원칙에 가까운 말이었다.
팔구십년대에 이르러 포용은 보다 구체적인 사회변화의 언어가 되었다.
장애인 시설 중심의 보호에서 지역사회로의 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통합이라는 개념이 사용됐지만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기준은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이었다.
장애인은 기존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로 남았다.
이 한계를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포용이었다.
사회가 다양한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청이었고 당시에는 분명 진보적인 언어였다.
권리를 대체하는 부드러운 유예
문제는 이천년대 이후다.
포용은 국가 정책과 복지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하며 하나의 표준 언어가 되었다.
누구도 포용을 반대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포용은 그 성격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포용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것이 권리를 대체하는 언어가 되었을 때다.
권리는 국가에게 무거운 말이다.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법적 의무를 수반하고 예산 투입이 필요하며 실패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권리는 시민이 국가를 상대로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청구하는 것이다.
반면 포용은 다르다.
포용이라는 말에는 명확한 기준도 실패에 대한 책임도 담기지 않는다.
대신 노력 인식 공감 사회적 분위기 같은 추상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박동진 국장 같은 관료들은 점진적으로 개선하겠다거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로 언제든 답할 수 있다.
포용은 책임을 부드럽게 유예할 수 있는 언어다.
포용이 가리는 것들
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김경훈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마이크가 그에게 주어졌다.
박 국장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국장님이 말씀하시는 포용이라는 단어가 저는 조금 불편합니다.
회의실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박 국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하시다니요. 우리는 장애인분들을 더 따뜻하게 품어 안겠다는 뜻입니다만.
김경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권리를 말하면 갈등이 발생합니다.
예산 배분과 우선순위의 충돌이 불가피하죠.
그런데 포용은 이 갈등을 도덕의 문제로 바꿉니다.
불평등을 단순히 시민들의 공감 부족 문제로 전환하는 순간 국가는 책임의 주체에서 슬며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는 발언을 이어갔다.
국가가 포용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미지 관리 때문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함께 가는 국가라는 착한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하겠다거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연의 언어 뒤에서 그 지연의 비용은 언제나 저 같은 당사자가 치릅니다.
포용하는 자와 포용되는 자가 나뉘는 순간 평등은 이미 깨져 있습니다.
장애인은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배려를 요청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니까요.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며
박 국장은 침묵하였다.
보보가 옆에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김경훈은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 자리에서 포용 자체를 전면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포용이 권리를 가리는 언어가 되었을 때 그것은 명백한 문제가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감이나 따뜻한 배려가 아닙니다.
기준의 전환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장애인은 포용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권리의 주체입니다.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상상해야 할 사회는 포용이 필요한 사회가 아닙니다.
애초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장애인의 삶이 굳이 설명되지 않아도 이해되고 권리를 애걸하지 않아도 보장되는 사회 말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사회일 뿐입니다.
회의실을 나서는 김경훈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윤리라는 따뜻한 외투를 벗어 던지고 정치와 책임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직시할 때 진짜 변화는 시작된다.
그는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