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외면당한 지폐의 진실

by 김경훈

요즘 우리들의 지갑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실물 카드 한 장조차 꺼내지 않고 스마트폰의 NFC 기능을 활용하거나 바코드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거래가 끝나는 세상이니까요.

사실 지폐를 구분하기 어려운 불편함 때문에 일찌감치 현금과 작별하고 카드 위주의 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단순한 취향을 넘어선 생존을 위한 리터러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편리한 디지털 결제의 그늘 아래에는 여전히 손끝으로 세상을 읽어야 하는 이들을 외면한 지폐의 차가운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행정이 남긴 선명하지만 무딘 점들


과거의 지폐는 액면가에 따라 폭과 길이의 차이가 뚜렷해 시각장애인도 크기만으로 돈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행 계수기의 효율성을 위해 지폐의 크기 차이가 줄어들면서, 시각장애인들의 화폐 식별권은 심각한 침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06년, 지폐에 점 표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천원권에는 점 하나, 오천원권에는 두 개, 만원권에는 세 개를 찍었죠.


문제는 이 점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선명한 검은색이지만, '손끝으로 느끼기에는' 너무나 무디다는 점입니다.

신권일 때는 그나마 촉각이 느껴지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닳고 마모된 지폐의 점은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합니다.

88올림픽 직전에 예산 절감을 위해 명칭만 변경했던 '장애인' 법적 명칭처럼, 지폐의 점 역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시기에 맞춰 외부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생색내기 행정'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 표식은 장식에 불과합니다.



[감각 사진]

오래된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어 봅니다.

지폐의 표면은 수많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 눅눅하고 부드러워져 있으며, 빳빳했던 종이의 질감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오른쪽 상단, 점 세 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예민하게 문질러 보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으로는 분명히 보이는 검은 점들이 손가락에는 그저 평평하고 매끄러운 종이의 일부일 뿐입니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정보는 눈앞에 명확히 존재하나 손끝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단절의 감각이 서늘하게 전해집니다.



4만 장의 지폐에 새긴 어느 시각장애인의 눈물겨운 투쟁


이 불통의 지폐를 견디다 못한 한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직접 백만 원어치의 지폐를 준비해 일일이 점자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저축했다가 다음 날 다시 찾는 과정을 3년 가까이 반복했습니다.

지폐 훼손으로 고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그는 오직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돈을 구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만 장의 지폐에 점자를 새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에서 찾은 돈 중에서 자신이 찍은 점자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지폐를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그 지폐 한 장은 그에게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세상과 연결되었다는 작은 증명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점자 찍기를 멈추고 친구에게 술을 샀다고 합니다.

한 개인의 헌신이 일궈낸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짊어져야 했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세계의 지폐가 보여주는 진정한 리터러시의 방향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요?

캐나다는 2001년부터 점자를 모르는 사람까지 배려해 특정 모양의 촉각 패턴을 도입했습니다.

유로화는 액면가에 따라 지폐 크기를 확실히 차별화하고 숫자 부분을 돌출 인쇄해 촉각 인식을 높였습니다.

특히 호주는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해 시간이 지나도 점이 닳지 않게 했으며, 점의 개수로 금액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온두라스는 한술 더 떠 2010년부터 정식 점자 문자를 지폐에 그대로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다며 눈에만 보이는 점을 찍어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추구해 온 정보 리터러시가 얼마나 편향적이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폐를 멀리하고 카드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에 발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 물리적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무장애(Barrier-free) 사회는 디지털 결제 수단의 보급만큼이나, 단 한 장의 종이 지폐를 만지더라도 그 가치를 평등하게 읽어낼 수 있는 세심한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손끝으로 읽는 돈이 더 이상 누군가의 특별한 투쟁이 아닌, 당연한 권리가 되는 날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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