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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의 지워진 양피지

시라쿠사의 천재가 남긴 불멸의 메타데이터

by 김경훈

지워진 양피지 위에서 부활한 유레카


기원전 이백팔십칠 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난 아르키메데스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이자 기계 공학자였다.

그는 목욕탕에서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달아 유레카를 외친 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문헌정보학 연구자인 나의 흥미를 끄는 대목은 따로 있다.

부력의 원리를 담은 그의 논문 부체에 관하여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망각의 늪에 빠져 있다가 일구영육 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중세의 어느 수도사가 아르키메데스의 그리스어 필사본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기도문을 덧대어 썼지만, 현대의 서지학자가 지워진 자국을 복원해 내어 원래의 데이터를 살려낸 것이다.

이는 인류의 위대한 지적 자산이 무지한 시대의 폭력을 견디고 끝내 살아남은 정보 생존의 숭고한 역사이다.

덧씌워진 얄팍한 텍스트 아래에 심연처럼 깊은 진리의 코드가 숨 쉬고 있었던 셈이다.



[감각 사진]

길고 고단했던 하루의 연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묵직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글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본다.

턱끝까지 차오른 따뜻한 물결이 긴장했던 근육의 틈새로 스며들고, 욕조 가장자리로 밀려난 물이 바닥으로 찰랑이며 넘쳐흐른다.

시각적인 자극이 완벽하게 차단된 욕실의 고요함 속에서, 나의 체중을 아래에서 위로 조용히 밀어 올리는 물의 묵직한 부력이 피부 전체를 단단하게 감싸 안는다.

무겁게 짓누르던 지구의 중력이 일순간 느슨해지며 내 몸이 물속에서 한없이 가볍게 부유할 때, 수천 년 전 시라쿠사의 낡은 목욕탕에서 한 천재가 온몸으로 맞닥뜨렸을 그 짜릿하고도 서늘한 깨달음의 온도가 시공간을 넘어 나의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흘러내린다.

거실 한편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의 평온한 숨소리만이 욕실의 습한 공기를 가르며 고대와 현대를 잇는 그 완벽한 평화의 순간 말이다.



지렛대의 철학과 실용적인 인터페이스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지렛대와 받침점을 주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구체의 부피를 계산하고 원주율을 증명하는 순수 수학의 대가였지만, 결코 상아탑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볼트와 너트를 고안하고 회전식 스크루를 만들어 곡물과 물을 퍼 올렸으며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플라네타륨까지 발명했다.

정보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복잡하고 난해한 수학적 알고리즘을 평범한 사람들도 일상에서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완벽한 물리적 인터페이스로 구현해 낸 최고의 개발자였다.

학문적 진리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도구로 번역될 때 비로소 거대한 세상을 들어 올리는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일찌감치 몸소 증명한 것이다.



방어벽이 된 지성, 제국의 무력과 맞서다


제이차 포에니 전쟁 당시 시라쿠사가 로마군의 무자비한 포위 공격을 받을 때, 아르키메데스의 지성은 조국을 지키는 가장 견고하고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로마군의 투석기보다 열 배나 강력한 병기를 설계했고, 기계식 쇠 집게가 달린 기중기로 다가오는 적선을 번쩍 들어 올려 장난감처럼 뒤집어엎었다.

심지어 거대한 포물면 반사경으로 태양빛을 한 점으로 모아 적군의 돛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거대한 제국의 군대조차 시대를 훌쩍 앞서간 한 명의 늙은 학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지성의 방화벽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고도화된 정보와 지식이 곧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잘 설계된 데이터 시스템 하나가 수만 명의 맹목적인 군대보다 훨씬 더 위력적으로 도시를 지켜낸 것이다.



영원한 진리를 좇다 칼날에 베인 최후


하지만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그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극적이고 철학적이다.

삼 년의 항전 끝에 시라쿠사가 마침내 함락되던 날, 아르키메데스는 도시가 불타는 줄도 모른 채 땅바닥에 수학 도형을 그리며 문제 풀이에 골몰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령관에게 끌고 가려는 로마 병사에게 중대한 과학적 발견의 실마리를 풀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간청했던 그는, 결국 모욕감을 느낀 무지한 병사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한다.

칼을 든 권력 앞에서도 모래 위에 그린 도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대과학자의 숭고한 죽음이다.

물리적인 육체는 로마군의 폭력 앞에 스러졌지만, 그가 좇았던 무한과 원주율의 세계는 결코 파괴되지 않았다.

진리를 향한 인간의 순수한 몰입은 죽음의 공포마저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그의 묵묵한 마지막 뒷모습이 시리도록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삶의 양피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아르키메데스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삶이라는 양피지 위에 어떤 종류의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는가.

훗날 무지한 시대의 폭력에 덧씌워져 잊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다시 발굴될 만큼 단단하고 본질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볼 일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 앞에서도 나만의 지렛대와 받침점을 찾아내고, 위기의 순간에 이성의 반사경으로 흩어진 빛을 모아낼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

얄팍한 트렌드와 소모적인 텍스트들이 쉴 새 없이 범람하는 오늘날,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내고 우리에게 기적처럼 도착한 아르키메데스의 낡은 양피지는 여전히 가장 뜨거운 목소리로 진리의 유레카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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