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로제와 코냑

포도 한 알에 담긴 600년의 인문학적 풍류

by 김경훈

오늘날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듣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류 팬 2억 2천만 명 시대, 바야흐로 '한류 4.0'의 물결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죠.

그런데 이 화려한 디지털 문명의 흐름 속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아주 오래전 보랏빛 향기를 머금고 한반도에 당도했던 한 과일의 역사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포도입니다.



실크로드를 건너온 보랏빛 유혹과 길상의 미학


한반도와 포도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되었습니다.

역사학계는 포도가 실크로드를 거쳐 삼국시대 무렵 중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통일신라 시대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옛 기와에 새겨진 정교한 포도 덩굴 무늬는 이 이국적인 과일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혹적인 예술적 영감을 주었는지 증명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포도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선 인문학적 상징이 됩니다.

한 덩굴에 수많은 알맹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은 다산과 다남, 그리고 가문의 번창을 바라는 선조들의 염원을 담은 '길상'의 징표였습니다.

신사임당의 묵포도도나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속의 포도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축복의 메시지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두밥과 누룩, 그리고 포도의 하이브리드 미학


예술이 있는 곳에 술이 빠질 수 없듯, 우리 선조들 역시 포도를 활용한 독자적인 양조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흔히 와인을 서양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 충렬왕 때 이미 서역의 포도주가 유입되었고, 조선 전기에 이르면 우리 땅의 기후에 맞춘 독화적인 양조법이 등장합니다.


1540년대 기록된 '수운잡방' 속의 포도주 빚는 법은 현대의 내추럴 와인 전문가들도 감탄할 만큼 독창적입니다.

서양 와인이 포도 자체의 당도와 효모에 의존한다면, 조선의 포도주는 '하이브리드' 방식이었습니다.

당도가 낮고 신맛이 강한 토종 산포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쌀로 빚은 고두밥과 누룩을 포도와 함께 버무려 발효시킨 것입니다.


[감각 사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한옥의 그늘진 기둥 옆, 짙은 흙빛의 옹기 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뚜껑을 열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갓 쪄낸 찹쌀의 구수한 단내와 잘 익은 포도의 새큼한 과육 향이 뒤섞인 진한 공기입니다.

항아리 속에서는 보랏빛 껍질과 하얀 쌀알이 누룩의 힘을 빌려 보글보글 낮은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고, 그 사이로 은은하게 배어 나온 연분홍빛 술줄기는 마치 봄날의 복숭아꽃잎처럼 화사한 색감을 띠고 있습니다.

손끝에 닿는 항아리의 서늘한 질감과 코를 간지럽히는 달콤하고 알싸한 발효의 냄새가 공간 전체를 풍성하게 채웁니다.


이러한 방식은 쌀의 부드러운 바디감과 포도의 향긋한 과즙이 어우러져, 서양 와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은 맛을 만들어냈습니다.

맑은 부분만 걸러낸 그 술은 요즘 유행하는 로제 와인보다도 훨씬 고운 빛깔과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조선의 로제'였습니다.



불로 빚은 이슬, 포도소주의 사치스러운 향취


진정한 미식의 정점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 귀한 포도주를 다시 불로 다스려 증류해내는 '포도소주'를 즐겼습니다.

19세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포도소주방'은 오늘날의 코냑이나 브랜디 제조법과 궤를 같이합니다.


잘 익은 포도주를 가마솥에 붓고 소줏고리를 얹어 장작불을 지피면, 포도의 폭발적인 향취가 한 방울의 투명한 진액으로 응축되어 떨어집니다.

당시 포도는 그 자체로도 매우 귀한 과일이었기에, 쌀과 누룩, 그리고 포도까지 듬뿍 넣어 증류해낸 이 술은 그야말로 극강의 사치품이었습니다.

수율과 원가로 따지면 오늘날의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니, 오직 왕실과 최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미식의 결정체였던 셈입니다.



전통의 복원과 K-브랜디의 부활


조선 최상류층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던 포도소주의 명맥은 오늘날 한국의 지역 와이너리들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국산 와인을 넘어 프리미엄 'K-브랜디' 시장을 개척하는 이들의 노력은 600년 전 선조들이 항아리 속에 담았던 그 인문학적 풍류와 지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이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재료와 방식으로 빚어낸 이 맑은 술 한 잔에는 실크로드를 건너온 보랏빛 열매가 우리 땅의 곡물과 만나 소주라는 이슬로 맺히기까지의 긴 시간이 녹아 있습니다.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도소주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미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문화 유산입니다.

조선의 로제에서 코냑까지, 그 깊은 향취 속에 담긴 선조들의 풍류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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