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버럭 전우치
위대한 황제이자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 형님의 '명상록'을 읽다가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걱정과 근심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니! 형님, 그게 말처럼 쉬우면 제가 벌써 시라쿠사의 현자가 되어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백 번은 외쳤을 겁니다.
하지만 형님의 논리는 서슬 퍼렇게 날카롭다.
짜증과 스트레스는 외부 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가치판단'에서 나온다는 것.
즉, 누군가 나를 빡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빡치기로 선택했다는 이 잔인한 진리!
[감각 사진]
거실 소파 위, 한 남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화면에는 '수정 요청'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메일이 떠 있다.
남자의 머리 위로는 번뇌의 먹구름이 둥둥 떠다니는데, 그 아래에서 리트리버 한 마리가 남자의 발등에 턱을 괴고 "형, 그 메일은 그냥 빛의 파동일 뿐이야.
내 꼬리나 좀 만져봐"라고 유혹하는 평화로운 방해의 순간이다.]
직장 생활이나 원고 마감에 시달리다 보면 우리는 흔히 "상사가 짜증 나게 해", "업무가 나를 압박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이건 완전히 틀린 문장이다.
상사는 그저 입을 열어 공기 중의 파동을 만들었을 뿐이고, 업무는 모니터 위의 픽셀 덩어리일 뿐이다.
그 파동과 픽셀에 '짜증'이라는 색칠을 하고 내 마음의 거실로 들여보낸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소리다.
이걸 내 일상에 대입해 보니 참 '웃픈' 풍경이 그려진다.
산책 중에 탱고가 갑자기 멈춰 서서 5분 동안 남의 집 담벼락 냄새만 맡고 있을 때, 내 마음속에선 "빨리 가야 하는데!"라는 짜증의 내전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 형님 식으로 생각하면, 탱고는 그저 에티오피아의 칼디처럼 새로운 '빨리 열매(냄새)'를 발견한 것뿐이다.
짜증은 탱고가 주는 게 아니라, '산책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내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보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보보가 "자기야, 셔츠 뒤집어 놓지 말라고 했지!"라고 외칠 때, 예전의 나는 "왜 별것도 아닌 걸로 그래!"라며 페리숑 씨처럼 옹졸하게 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한다.
'보보의 목소리는 공기의 진동일 뿐이다.
내 마음의 구체가 굴러가서 화라는 벽에 부딪히게 두지 말자.' 물론, 이렇게 마음먹고 3초 뒤에 다시 "미안해!"라고 비굴하게 외치는 게 내 현실적인 '위상 변화'이긴 하지만 말이다.
데이비드 봄의 말처럼 모든 것이 연결된 홀로그램 우주라면, 내 짜증 역시 우주 전체의 정보 중 아주 하찮은 노이즈일 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로마군이 들이닥쳐도 도형을 그렸던 그 집중력으로, 나도 외부의 소음 대신 내 내면의 평온에 집중해 보려 한다.
타인의 잘못은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그 쿨한 자세!
물론 오늘도 탱고가 내 발가락을 밟고 지나가며 '강아지 지렛대의 원리'를 몸소 체험시켜 줄 때, 내 좌우명 '불기자심'을 지키며 솔직하게 외칠 것 같다.
"아우, 아파! 이건 가치판단이 아니라 실재하는 통증이라고, 아우렐리우스 형님!"
결국 걱정과 근심은 내 마음이라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불량품들이다.
오늘부터는 공장 가동을 잠시 멈추고, 칼디의 염소처럼 커피 향기에 취해 탭댄스나 추며 살아야겠다.
내 마음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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