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캠퍼스 연구실은 오늘도 논문의 ‘참신함’을 강요하는 학문적 압박과 나의 ‘보수적인’ 수면 본능이 치열하게 교전 중이다.
문헌정보학 박사 과정을 밟는 연구자로서 나는 늘 고민한다.
내 논문이 세상을 뒤흔들 천재적인 혁신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데이터의 나열인가.
그런데 오늘 노스웨스턴 대학교 벤저민 존스 교수의 연구를 접하고 나는 깊은 안도와 함께 묘한 블랙코미디적 영감을 받았다.
너무 참신한 아이디어는 오히려 외면당하기 쉽다는 그 정직한 데이터 말이다.
존스 교수는 1,800만 건이라는 어마어마한 과학 논문을 분석해 ‘혁신성’과 ‘영향력’의 상관관계를 파헤쳤다.
결과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후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논문은 혁신성만 높은 것이 아니라, 의외로 ‘보수성’ 역시 매우 높았다.
혁신성 점수가 상위 10~15퍼센트 정도일 때 영향력이 가장 컸고, 그보다 더 혁신적이면 오히려 이해받지 못해 영향력이 뚝 떨어졌다.
즉, 100퍼센트 새로운 것은 정보가 아니라 ‘외계어’로 취급받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 같은 시각장애인 연구자에게 꽤나 위안이 되는 소식이다.
나는 점자가 느리고 지팡이도 쓰지 않는다.
대신 듬직한 나의 파트너 탱고의 가죽 하네스를 잡고 세상을 읽는다.
하네스는 나의 ‘보수적’인 기반이다.
탱고의 어깨 근육이 전하는 익숙한 진동이 베이스가 되어야만, 나는 그 위에 ‘혁신적’인 새로운 경로 탐색이라는 향신료를 뿌릴 수 있다.
만약 탱고가 매일 아침 한 번도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예를 들면 공중부양이라거나)으로 나를 안내하려 한다면, 나의 보행 시스템은 단 5분 만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연구팀은 혼자 하는 연구가 팀 연구보다 훨씬 보수적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사고가 정형화되기 때문이다.
나의 ‘팀’은 꽤나 다채롭다.
2배속으로 쏟아지는 스크린리더의 기계음, 매일 아침 나에게 새로운 비누를 소개해주는 보보, 그리고 내 발등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탱고가 나의 연구 파트너들이다.
보보가 건네주는 몰약비누나 산양유비누, 흑설탕비누로 샤워하며 나는 고대 이집트의 처방(보수성)과 현대의 향기(혁신성)가 결합하는 마법을 경험한다.
아침에는 잠을 깨우는 상큼한 과일비누로, 저녁에는 먼지를 털어내는 흑설탕비누로 내 몸을 인덱싱할 때, 나의 사고는 비로소 정형화된 틀을 깨고 15퍼센트의 참신함을 얻는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할 때 당대의 수학을 그대로 사용했고, 다윈의 진화론 역시 당시 잘 알려진 사육 지식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라는 아주 튼튼하고 보수적인 기반 위에 올라서서 딱 한 뼘 더 멀리 보았을 뿐이다.
나 역시 1,800만 건의 논문이라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다.
스크린리더가 읊어주는 선행 연구들의 참고문헌은 나에게 그 거인들의 키가 몇 센티미터인지 알려주는 메타데이터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도 이 이론은 적용된다.
탱고는 안내견이라는 아주 보수적이고 엄격한 훈련 체계(보수성) 위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녀석은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혁신적인 행동을 한다.
지난번 에세이에서 녀석이 소시지를 좋아한다고 썼지만, 사실 녀석의 진짜 ‘혁신적 최애’는 고소한 치즈다.
치즈 봉지의 미세한 부스럭거림을 포착하는 녀석의 청각 리터러시는 테슬라의 무선 전신 장치보다 예리하다.
안내견의 본분을 지키면서도(보수성), 치즈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해 가장 불쌍한 표정의 각도를 계산하는 것(혁신성), 이것이 바로 탱고가 후세(나의 다음 간식 구매 계획)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의 비결이다.
존스 교수는 자신의 사고 출처를 밝히는 사람은 일류이고, 빌려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은 이류라고 했다.
나는 일류 연구자가 되기 위해 오늘 내가 느낀 이 상쾌한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태양광과 대기 오존의 화학 반응(노난알, 옥탄알 등) 덕분임을 명확히 인덱싱한다.
또한 내 삶의 유쾌한 위트들이 보보의 비누 취향과 탱고의 치즈 갈망에서 빌려온 것임을 잊지 않는다.
결국 혁신이란 전통적인 아이디어에 약간의 향신료를 가미해 천상의 맛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나는 너무 앞서가서 외면받는 외로운 천재가 되기보다는, 탱고의 묵직한 하네스를 잡고 보보가 선물한 비누 향기를 풍기며 사람들에게 이해받는 15퍼센트의 혁신가가 되고 싶다.
나의 박사 논문도 너무 참신해서 교수님들을 당황하게 하기보다, 기존의 문헌정보학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 '경훈'이라는 이름의 향신료를 딱 한 스푼만 얹은 명작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흑설탕비누 거품 속에서 폭약의 원료인 글리세린과 세정제의 비누 분자가 공존하는 이치를 묵상한다.
파괴와 청결이 동전의 양면이듯, 보수와 혁신도 내 인생 장부의 차변과 대변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흑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탱고는 옆에서 치즈 꿈을 꾸는지 발을 움찔거린다.
녀석의 꿈속에서도 아마 거대한 치즈 산 위에 올라탄 거인들이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