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가 살아오며 가장 흔하게 듣는 위로이자 격려가 있다.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들으면 이보다 공정하고 단정한 선언은 없다.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고 길이 놓여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개인의 뼈를 깎는 노력뿐이라는, 아주 깔끔한 자본주의적 능력주의다.


하지만 그 열린 문 앞까지 걸어가는 길에 누군가는 매끄러운 무빙워크를 타고, 누군가는 깨진 유리 조각이 널린 가파른 계단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면 어떨까.

사회는 늘 똑같은 호루라기를 불며 같은 규칙으로 뛰라고 말하지만, 출발선에 서기 위한 조건은 단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이것은 사월 이십오일의 벅찬 결혼식을 마치고 떠나온 신혼여행지에서, 완벽하게 열려 있다는 친절한 환영 인사 이면에 숨겨진 단단한 구조적 닫힘을 마주하고, 진짜 평등의 조건을 설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어느 봄날 아침의 기록이다.



낭만의 바다와 좁은 널빤지


제주도 남쪽의 한 요트 선착장.

바닷바람에는 비릿하고도 낭만적인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무사히 결혼식을 마치고 부부가 된 김경훈과 보보, 그리고 그들의 든든한 동반자 탱고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와 있었다.


오늘은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프라이빗 요트 투어가 예약된 날이었다.

선착장에는 이십 대 후반의 쾌활하고 열정적인 요트 가이드 정민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경훈 고객님 환영합니다. 정민우 가이드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저희 요트 투어는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장애가 있으시든 안내견이 있든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자 이제 저를 따라 배로 올라타실까요.


그의 말은 더없이 친절했다.

하지만 김경훈이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현실의 물리적 장벽이 그 열린 기회를 가로막았다.

선착장에서 요트 갑판으로 이어지는 길은 폭이 한 뼘 남짓한 좁고 흔들리는 나무 널빤지 하나가 전부였다.

게다가 파도 때문에 배가 위아래로 계속 출렁이고 있었다.



출발선에 서지 못하는 평등


보보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드님 이 널빤지는 너무 좁고 위험한데요. 경훈 씨는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균형을 잡기 힘들고, 탱고도 네 발로 건너가기에는 파도가 쳐서 너무 아슬아슬해요. 휠체어 타신 분들은 아예 못 건너겠는데요.


정민우 가이드가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고객님을 직접 업고 건너가겠습니다. 저희는 어떤 불편함이 있으셔도 다 도와드리거든요. 안내견도 제가 번쩍 안아서 옮기겠습니다.


김경훈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이드님의 친절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이드님의 등에 업혀서 저 문을 넘고 싶지 않습니다.


가이드가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다.

네. 저희는 정말 모든 분을 평등하게 모시려고 최선을 다하는데요.


가이드님. 김경훈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과 그 문 앞까지 내 발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가이드님은 이미 운동장 안에서 뛰고 계시지만, 저는 지금 경기장 입구의 흔들리는 널빤지 앞에서 누군가의 동정 어린 도움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저를 업어서 옮겨주시는 건 고마운 배려지만,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닙니다.



조건의 재구성


바닷바람이 탱고의 황금빛 털을 흩트렸다.

탱고는 불안한 널빤지 앞에서 꼬리를 내린 채 김경훈의 다리에 바짝 붙어 있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회의 개방이 아닙니다.

김경훈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그 기회에 실제로 닿을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조건의 평등이라고 부릅니다. 조건의 평등은 모두에게 환영한다는 똑같은 문장을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휠체어를 타든 안내견과 걷든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널빤지 대신 넓고 평평한 철제 슬로프를 다시 설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슬로프를 요구하면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거나 특별 대우를 원한다고 수군거립니다. 하지만 제가 요구하는 것은 남들보다 앞서 출발하겠다는 특혜가 아닙니다. 그저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제 두 발로 출발선에 서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거나 제 삶을 해명하지 않고도 배에 오를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조건을 달라는 겁니다.



일상의 세부가 존엄을 결정한다


정민우 가이드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고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평등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문만 열어두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만들 생각은 못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보보가 가이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가이드님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우리 사회 전체가 여전히 비장애인의 몸과 표준 속도를 기준으로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죠. 오늘을 계기로 이 선착장에도 멋진 슬로프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결국 우리는 가이드와 보보의 양팔 부축이라는 불완전한 대체 수단을 통해 뱃머리에 올랐다.

요트가 푸른 바다를 향해 출발하고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김경훈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선착장에서의 실랑이가 깊게 남아 있었다.


평등은 결코 거창한 구호나 추상적인 철학에 있지 않다.

버스를 탈 수 있는가, 스마트폰의 광고 창을 스스로 닫을 수 있는가, 요트에 내 발로 오를 수 있는가.

결국 평등은 삶의 아주 구체적인 세부에서 판가름 난다.

그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조건들이 모여 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기도 하고, 벼랑 끝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주석 조건의 아키텍처


제목, 조건의 아키텍처 혹은 슬로프의 평등.

기회는 닫혀 있을 때보다, 열려 있다고 착각할 때 훨씬 더 폭력적이 된다.

나의 몸과 속도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사회의 슬로프가 아직 충분히 넓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미안해하지 않고, 내 결핍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어야 평등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결론, 진정한 평등은 결과 이전의 조건이며, 선언 이전의 설계다.

그나저나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고 온 신혼여행에서도 나의 깐깐한 직업병은 고쳐지질 않는다.

그래도 선착장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나를 말리지 않고 든든하게 지지해 준 아내 보보가 있어 참 다행이다.

앞으로의 우리 결혼 생활도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업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튼튼한 슬로프를 함께 지어가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탱고야, 너도 우리 셋이 함께 걷는 이 길이 마음에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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