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논문 더미에서 벗어나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싶다.
집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꼬리부터 흔들어주는 탱고의 푹신한 뱃살을 베고 그냥 좀 누워있고 싶다.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어야 하나, 하는 고민 따위는 잠시 잊고 싶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엉망으로 취하고 싶다.
다음 날의 숙취나 헝클어진 기억 따위는 걱정하지 않고 싶다.
세상 모든 시름을 알코올에 녹여버리고 싶다.
보보의 깨물기가 두렵긴 하지만, 딱 하루만 모든 책임감에서 벗어나 바보처럼 웃고 싶다.
비 오는 날, 이어폰을 빼고 빗소리만 온전히 듣고 싶다.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 바퀴의 물 가르는 소리
소리만으로 온전한 풍경 하나를 마음속에 그리고 싶다.
흙냄새를 더 진하게 맡고 싶다.
한 번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처음 가보는 길을 헤매고 싶다.
흰 지팡이의 탐색이나 탱고의 안내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싶다.
길을 잃고 싶다.
낯선 행인에게 길을 묻고 싶다.
그러다 우연히 멋진 카페라도 하나 발견하고 싶다.
'길 잃음'이 불안이 아니라 '모험'이 되는 그런 하루를 살고 싶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로 가득 찬 서재에서 평생 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이야기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작가들의 영혼과 밤새도록 대화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불편함과 부조리에 명쾌한 이름을 붙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고, 그냥 느끼기만 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되돌려주고 싶다.
아버지가 그랬듯, 말없이 든든한 어깨를 빌려주고 싶다.
보보가 그렇듯, 나의 가장 못난 모습까지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탱고가 그렇듯,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곁을 지켜주고 싶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더 지혜롭거나, 더 강해지거나, 더 부유해지는 것 말고.
그냥,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의 상처에 무심하지 않고, 나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만하면 꽤 괜찮은 삶이었다’고, 웃으며 말하고 싶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고마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수많은 ‘싶다’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고 싶다.
오늘 밤에는 좋은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