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멈, 평온한 얼굴 뒤의 스파이시함에 대하여

by 김경훈

보보와 함께 보드게임을 하던 어느 주말.

평소에는 ‘삶의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다’며 부처님 같은 평온함을 유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게임에서 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한 판만 더!”를 외치는 그녀에게서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낯선 승부욕의 향기가 났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새롭고 매력적이던지.


그녀의 이 반전 매력은 향신료의 세계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카다멈(Cardamom)’을 떠올리게 한다.

카다멈은 생강과에 속하는 식물의 씨앗으로, 달콤한 요리부터 짭짤한 요리까지 넘나드는 전천후 스파이스다.

한국에서는 단옷날 마시던 음료 ‘제호탕’에 ‘사인(砂仁)’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향은 유칼립투스나 민트처럼 시원하면서도, 후추처럼 맵고, 레몬처럼 상큼한, 아주 복합적인 얼굴을 가졌다.


이 독특한 성격 때문에, 카다멈은 다른 향을 만났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시트러스 계열 향수에 들어가면 레몬 향을 더욱 생생하게 증폭시키고, 미묘한 스파이시함으로 전체 향에 긴장감과 깊이를 더한다.

조 말론 런던의 ‘미모사 앤 카다멈’을 뿌렸을 때 처음 느껴지는 그 기분 좋은 낯섦이 바로 이것이다.

카다멈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보다, 다른 향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탁월한 의미 강화제(Semantic Enhancer)인 셈이다.


향이나 맛의 세계는 평면적인 감상이 아니라 입체적인 구조에 가깝다.

각각의 향과 맛은 고유의 질감과 온도를 가진 데이터가 되고, 카다멈 같은 존재는 이 데이터들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일종의 알고리즘(Algorithm)처럼 작동한다.

그것은 단순한 향의 추가가 아니라, 전체적인 감각적 상호작용(Sensory Interaction)의 판을 바꾸는 행위다.


결국, 사람이나 향신료나, 진정한 매력은 예측 불가능한 복합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평온할 것만 같던 보보의 내면에 숨겨진 뜨거운 승부욕처럼.

시원하고 상큼할 것만 같은 향기 속에 숨겨진 톡 쏘는 스파이시함처럼.

그 평온한 얼굴 뒤의 짜릿한 반전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그 존재를 탐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카다멈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나도 이 ‘의미 강화제’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어졌다.

디퓨저에 카다멈 오일을 한 방울? 넣었다.

유칼립투스와 레몬, 페퍼의 조화가 디퓨저의 풍미를 한 단계 끌어올려 줄 것이라 확신했다.

결과는? 디퓨저와 카다멈이 만나, 세상에 없던 향, 마치 ‘한약 향 콜라’ 같은 기묘한 향기가 탄생했다.

그렇다.

모든 조합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 아침, 나는 얌전히 몰래 디퓨저를 버렸다. 혁신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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