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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옷을 입는다. 매일 아침, 우리는 옷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그날의 ‘나’를 코딩(Coding)할 데이터를 검색한다. ‘신뢰감을 주는 비즈니스맨’,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건강미 넘치는 운동선수’. 우리는 이 사회가 이미 규정해 놓은 수백만 개의 ‘본질(Essence)’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 하나를 골라, 재킷과 셔츠, 혹은 청바지라는 이름의 스킨(Skin)을 입는다. 우리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코드가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는지 확인하며 안도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세계에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약, 당신이 접속해야 할 데이터베이스가 ‘시각’이 아닌, 오직 ‘촉각’과 ‘기억’이라는 이름의 낡은 아카이브 뿐이라면. 당신은 ‘파란색 셔츠’가 주는 신뢰감이나, ‘붉은색 드레스’가 뿜어내는 매혹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당신이 구축한 ‘나’라는 아키텍처가 세상의 그것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패션. 그것은 어쩌면 가장 화려하고도 가장 기만적인 시각의 폭력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성’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가장 엄격한 판옵티콘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것은 그 시각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나 그로 인해 또 다른 시스템의 오류에 부딪혀야 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그의 옷장이 아니라, 그의 옷장에 담긴 ‘정보의 구조’와, 그 구조가 붕괴되는 순간에 대한, 어느 늦가을 아침의 기록이다.



1. 꼬여버린 인덱스


대구의 하늘은 아직 희미한 여명에 잠겨 있었지만, 김경훈의 아파트 침실은 이미 분주한 아침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옷장 문을 활짝 열어둔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주인의 이른 기척에 잠이 깬 안내견 탱고가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꼬리만 ‘툭, 툭’ 치고 있었다.


김경훈은 오늘, 자신의 모교에서 열리는 중요한 학술 포럼의 기조연설자로 나설 예정이었다. ‘미래 도서관의 정보 접근성 아키텍처’. 그의 연구 분야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였고, 스승인 이석현 교수와 수많은 학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그는 완벽해야 했다.


그의 입가에는 평소의 유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연사의 미세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것은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그의 옷장 역시, 완벽한 정보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는 색깔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시각적 기억에 의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촉각’과 ‘위치’라는 이름의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그의 옷장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재질’과 ‘용도’에 따라 엄격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가장 왼쪽은 면(Cotton) 셔츠 구역. 그중에서도 얇은 드레스 셔츠와 두꺼운 옥스퍼드 셔츠가 다시 나뉘었다. 그다음은 울(Wool) 재킷 구역. 가장 매끄럽고 촘촘한 질감의 ‘네이비 슈트’(중요한 발표용), 그것보다 조금 더 거칠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차콜 그레이 슈트’(일반 학회용), 그리고 가장 두껍고 뚜렷한 능직(Twill) 무늬가 만져지는 ‘갈색 체크무늬 재킷’(주말 데이트용). 넥타이 역시, 실크(발표용)와 니트(캐주얼)로 나뉘어 별도의 서랍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의 시스템은 완벽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이 시스템을 통해 단 한 번의 ‘오류’도 없이 그날의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는 ‘김경훈’을 성공적으로 코딩해 왔다.


오늘은 가장 중요한 날. 그는 망설임 없이 ‘울 재킷 구역’의 가장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은 ‘네이비 슈트’의 자리였다. 그는 손끝으로 옷걸이를 들어 올려, 그 매끄럽고 차가운 원단의 감촉을 확인했다. 완벽했다. 그는 15년 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가장 근사했던 양복의 그 ‘네이비’ 색깔, 깊고 차가운 신뢰의 색을 떠올렸다. 그는 이어서 ‘실크 타이’ 서랍에서 오른쪽 세 번째에 위치한, 그가 ‘파란색 스트라이프’라고 기억하는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그는 거울을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렌더링 된 이미지는 완벽했다. 신뢰감을 주는 지적인 연구자 ‘김경훈 박사’.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재킷을 걸쳤다.


“자기야! 나 아직 잠옷 바람인데, 커피부터 내려?”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며 보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보다 몇 해 연상인 철학 박사였고, 그들의 아침은 언제나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와 커피 향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그에게 다가오다가 재킷을 막 걸쳐 입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김경훈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침묵에서 시스템이 붕괴하는 소리를 들었다.

“... 왜?” 그가 물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보보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으려는 듯 어깨를 떨고 있었다.

“... 아니, 자기야. 오늘 발표 컨셉이… 혹시 ‘스코티시 젠틀맨’이야? 아니면… 1970년대 영국 시골 영문학과 교수님?”


김경훈의 뇌가 정지했다. “... 무슨 말이야?”


“아니…” 그녀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갈색 체크무늬 재킷은 어디서 꺼내 입었어? 그것도, 그… 와인색 넥타이는 또 뭐야? 와, 이 조합… 진짜 힙한데? 거의 복고의 왕인데?”


김경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갈색 체크? 와인색?

“... 이거, 네이비 슈트 아니었어? 이거, 파란색 넥타이 아니었냐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재킷 옷깃을 만졌다. 분명히 매끄럽고 촘촘한, ‘네이비’의 감촉이었는데.

“아, 그거.” 보보가 미안함과 웃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 톤으로 그렇게 짐작했다.)

“미안, 자기야. 내가 지난 주말에 옷장 정리 싹 했거든. 가을 옷 꺼내면서. 아마 그때 자리가 좀 바뀐 것 같아. 당신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그녀가 그의 재킷을 벗겨주며 덧붙였다.

“당신이 꺼낸 그 ‘네이비’는 실은 내가 작년에 사준 그 ‘이탈리안 울’ 재킷이야. 그것도 갈색 체크랑 감촉이 비슷했나 보네. 그리고 그 넥타이는… 파란색이 아니라, 와인색 페이즐리 무늬야. 하하. 당신의 그 완벽한 촉각 데이터베이스, 오늘 완전 꼬였네. 인덱스가 엉망이 됐어.”


김경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가장 신뢰했던 시스템에게, 그리고 그 시스템을 교란시킨 가장 사랑하는 연인에게, 완벽하게 배신당했음을 깨달았다.

“망했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나 이제 뭐 입고 가. 나, 아무것도 못 믿겠어.”



2. 아키텍처의 재구축


그는 정말로 절망했다. 그것은 단순히 옷을 잘못 입을 뻔했다는 사소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20년간 구축해 온,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처하는 그만의 방식, 그의 ‘존재론적 아키텍처’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그의 시스템은 보보라는 가장 사랑하는 변수에 의해,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깊은 좌절을, 보보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자기야,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그녀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가 당신의 세계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 당신의 그 시스템이 당신에게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세상을 항해하는 지도였다는 걸… 내가 잠시 잊었어.”


김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이 이토록 취약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자신이 결국 타인의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그 냉혹한 진실에 좌절했을 뿐이었다.


“일어나 봐.” 보보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오늘, 당신의 그 꼬여버린 인덱스를 완벽하게 재정비해 줄게. 당신이 잃어버린 ‘시각’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보보’라는 이름의, 훨씬 더 정확하고 사랑스러운 외부 인터페이스를 설치해 주겠다고.”


그녀는 그를 옷장 앞으로 다시 이끌었다.

“자, 지금부터 이건 ‘김경훈’이라는 본질에, 오늘 ‘학회에서 가장 지적이고 섹시한 연사’라는 실존을 코딩하는 작업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철학 박사다운 유쾌함이 돌아왔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재킷 하나를 만지게 했다.

“자, 이게 진짜 네이비야. 만져봐. 아까 그 ‘갈색 교수님’ 옷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매끄럽고, 차갑지? 15년 전 기억 속에 있는 그 ‘네이비’ 색깔 떠올려봐. 깊은 밤바다 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한, 차갑고 지적인 색. 이 감촉이 바로 그 색이야.”


김경훈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끝의 감촉에 집중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이 원단은 아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단단한 밀도를 가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네이비 슈트’라는 데이터가 이 새로운 촉각 정보와, 보보의 목소리라는 음성 정보와 함께, 새롭게 ‘인덱싱’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완벽한 흰색 셔츠를 입히고, 그의 손에 넥타이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건, 당신이 아까 골랐던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훨씬 더 세련된, ‘실버 그레이’ 톤의 넥타이야. 재질은 같지만, 이게 당신의 ‘네이비’를 더 돋보이게 해 줄 거야.”


그녀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넥타이를 직접 매주었다. 그는 거울 없이도, 그녀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매듭의 형태를,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는 그 따뜻한 감각을 느꼈다. 이 순간, 그에게 옷은 더 이상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와 ‘접촉’의 문제였다.


“그런데 말이야, 보보.” 그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짓궂게 물었다. “내가 15살 때, 그러니까 눈이 보일 때 말이야. 그때 내가 미쳐 있었던 패션이 있어. H.O.T. 캔디 시절에 유행했던, 그 털 달린 방울 모자. 그거 쓰고, 멜빵바지 입고. 만약 내가 지금 그 꼴로 당신 앞에 나타나도… 당신, 나한테 멋있다고 해줄 거야?”


보보는 그의 넥타이를 단단히 조이고, 그의 어깨를 바로잡아 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진지해서 그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물론이지, 자기야. 그리고 나는 즉시, ‘억압된 유년기의 탈주와 포스트모더니즘적 키치(Kitsch)의 전복적 결합’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쓸 거야. 그래서 당신을,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김경훈은 그녀의 말에, 온 마음을 다해 웃었다. “와… 당신이란 철학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내가 졌어.”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오늘은 그냥 내가 입혀주는 대로 입어.”



3. 새로운 아키텍처


그날 오전, 대학교의 학회장은 수많은 지성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김경훈은 연단 위에 서 있었다. 탱고는 그의 발치에 듬직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재단된 네이비 슈트와, 세련된 실버 그레이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자신이 지금 완벽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옷은 더 이상 그만의 ‘촉각적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보의 ‘시각적 확신’과 결합된, 두 사람의 공동 작업물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정보의 아키텍처’에 대해 준비된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유쾌했고, 그의 논리는 명쾌했다. 그는 15살의 시각적 기억과, 20년의 비시각적 경험을 넘나들며, 사용자가 길을 잃지 않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역설했다.


청중석에는 그의 스승인 이석현 교수도, 그리고 그의 라이벌이자 후배인 박민준도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완벽한 논리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연설의 마지막에, 각본에 없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의 목소리에 따뜻한 온기가 실렸다. “우리는 옷이라는 이름의 ‘데이터’로, 혹은 직함이나 성과라는 ‘데이터’로 우리 자신을 ‘코딩’하죠. 그리고 그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저는 제가 ‘네이비 슈트’라고 굳게 믿었던, 아주 근사한 ‘갈색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 완벽했던 옷장 아키텍처가 지난밤 저의 연인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이석현 교수까지도, 그의 이 뜬금없는 고백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이것이 청중의 이목을 끌기 위한, 계산된 유머라고 생각했다.


“여러분은 지금 웃으시지만,” 김경훈의 목소리가 다시 진지해졌다. “저에게는 이것이 제 연구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정보 접근성이란, 혹은 진정한 시스템이란, 결코 혼자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요.”


그는 보보가 앉아 있을 객석의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의 시스템은 언제든 붕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축한 논리는 예상치 못한 변수(사랑스러운 연인의 옷장 정리 같은)에 의해 언제든 꼬여버릴 수 있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지성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아키텍처란, 홀로 완벽한 요새를 쌓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기꺼이 타인의 시스템—타인의 눈, 타인의 조언, 타인의 도움—과 ‘접속’하고 ‘연결’되려는 태도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제게는 오늘 아침 제 넥타이를 골라주고, 저의 이 꼬여버린 시스템을 바로잡아준, 저의 가장 신뢰하는 ‘외부 인터페이스’가 있습니다. 오늘 저의 이 발표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 연결의 결과물입니다. 감사합니다.”



4. 주석: 정체성의 아키텍처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그는 깊은 피로와 함께, 그보다 더 큰 충만함을 느꼈다. 보보는 그의 발표가 ‘역대급으로 섹시했다’며,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잔 따라주었다. 탱고는 보보가 구워준 육포를 씹으며 만족스럽게 꼬리를 흔들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오늘 아침 자신이 입을 뻔했던 그 ‘갈색 체크무늬 재킷’을 손으로 만져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실패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깨달음의 증거였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이 복잡했던 하루의 경험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정체성의 아키텍처, 혹은 꼬여버린 인덱스.

우리는 옷으로 자신을 ‘정의(Define)’한다. 하지만 시각이 차단된 나에게, 옷은 ‘정의’가 아니라 ‘검색(Retrieve)’의 문제다. 나는 내 옷장을 촉각과 공간 기억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인덱싱’한다.

오늘 아침, 보보가 이 인덱스를 망가뜨렸다. 나는 ‘네이비’를 검색했지만, ‘갈색 체크무늬’가 호출되었다. 완벽한 시스템 오류.

하지만 사르트르는 옳았다. 나의 ‘본질’(시각장애인 연구원)은 나의 ‘실존’(오늘의 발표자)을 규정하지 못한다. 나는 실패한 시스템을 탓하는 대신, 보보라는 ‘타인의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는 나를 위해 규칙을 바꾸는 농구 코트의 마이클이었고, 150개의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던 집요함이었으며, 좁은 방에서 자신만의 문장을 고안해 낸 제인 오스틴이었다.

결론: ‘패션’의 완성은 옷이 아니라, 그 옷을 골라준 사람에 대한 ‘신뢰’다. 오늘 내가 입었던 것은 네이비 슈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보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갑옷이었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아키텍처란, 오류가 없는 시스템이 아니라, 오류가 발생했을 때 기꺼이 나의 손을 잡아주는 ‘연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 그나저나, 이 갈색 체크무늬. 만져보니 꽤 비싼 원단인데. 이거 당근 마켓에 팔면 돈 좀 되려나? 아니지, 보보가 알면 죽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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