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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규칙(Rule)’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성(城) 안에서 살아간다. 문법, 법률, 사회적 규범. 이 시스템들은 혼돈스러운 세상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그르다’. ‘이다음에는 반드시 저것이 와야 한다.’ 우리는 이 명쾌한 논리의 아키텍처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견고한 성에는 설계자조차 예측하지 못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남겨둔 ‘예외’라는 이름의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 ‘-율(率)’과 ‘-률(律)’. 이 단순한 한글 표기법조차, ‘모음이나 ㄴ 받침 뒤’라는 까다로운 예외 조항을 품고 있다. ‘두음법칙’이라는 거대한 원칙은 ‘냥(兩)’이나 ‘리(理)’ 같은 사소해 보이는 의존 명사들 앞에서 혹은 ‘신립(申砬)’이라는 고유한 이름 앞에서 잠시 그 위력을 거둔다.


왜 예외는 존재하는가? 그것은 시스템의 오류인가 아니면 오히려 시스템을 더 유연하고 인간적이게 만드는 숨겨진 장치인가. 어쩌면 삶이란, 그 거대한 ‘원칙’의 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허락된 ‘예외’의 통로를 찾아 헤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 예외의 아키텍처에 대한 이야기다. ‘표준’과 ‘규칙’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기를 거부한 두 남녀가 서로의 ‘예외’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꺼이 사랑하게 되는 어느 늦가을 오후의 기록이다.



1. 규칙의 세계, 그리고 ‘-률’의 침입


김경훈의 연구실은 완벽한 질서의 세계였다. 그의 책상은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갓 내린 케냐 원두의 산미와, 그가 아끼는 가죽 장정의 철학 서적에서 풍기는 묵은 종이 냄새가 감돌았다. 그는 지금, ‘연구 모드’의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유쾌한 미소가 아닌, 복잡한 코드의 논리적 오류를 추적하는 엔지니어의 날카로운 집중력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장애인 고용 통계 데이터베이스’의 정보 구조를 설계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데이터가 ‘고용률’, ‘이직률’, ‘산재율’ 같은 표준화된 항목으로 분류되어야 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규칙’과 ‘표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발치에서 이 지적인 긴장감을 공유라도 하듯, 안내견 탱고도 미동 없이 엎드려 있었다.

그때, 이 견고한 질서의 세계에, 가장 예측 불가능한 ‘예외’가 침투했다.


“자기야! 나 왔어!”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보보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연구실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 냄새와, 그녀가 방금 사 온 듯한 따뜻한 붕어빵의 달콤한 냄새를 몰고 들어왔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한국 사회의 엄격한 ‘규칙’들에 유쾌한 딴지를 걸었다.


“어이구, 우리 김 박사님. 또 세상 구하느라 미간에 그랜드 캐니언 파였네.”

그녀는 그의 굳은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의 뺨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서는 늘 그렇듯, 그가 좋아하는 ‘딥티크 오 로즈’의 잔향과,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김경훈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팽팽했던 집중의 실을 놓아버렸다. 그의 얼굴에서 ‘연구 모드’의 서늘함이 사라지고, ENFJ 특유의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가 돌아왔다.

“아, 보보. 왔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나 지금 죽는 줄 알았어. ‘사망률’이니 ‘출산율’이니 하는 단어들이랑 씨름하다가 내 ‘생존율’이 먼저 떨어질 뻔했네.”


“사망률? 출산율?” 보보가 그의 무릎 위에서 편안하게 자리를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반말이었고, 그의 학문적 고뇌를 귀여워하는 듯한 짓궂음이 묻어 있었다.

“왜? 그 단어들이 뭐 어쨌다고?”


“아니, 그냥…” 김경훈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투덜거렸다. “이놈의 한글 맞춤법 말이야. 왜 ‘사망률’은 ‘률’이고, ‘출산율’은 ‘율’이야? 둘 다 똑같은 ‘비율’인데. 누구는 받침이 있고, 누구는 없다는 거야? 이거 완전 차별 아니야?”


그는 시력을 잃은 후, 세상의 모든 정보를 ‘소리’와 ‘논리’로 재구성해야 했다. 그에게 ‘규칙’은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도구였고, 그 규칙에 ‘예외’가 있다는 것은 시스템의 ‘버그’이자,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오류’였다.


“어디 보자.” 그가 아이폰을 들어, 화면낭독기로 ‘한글 맞춤법 제11항 붙임 1’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화면낭독기 음성]: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 률’은 ‘열, 율’로 적는다.”


“거봐!” 그가 소리쳤다. “이거 완전 불합리하잖아! 왜 하필 ‘모음’이랑 ‘ㄴ’ 받침 뒤에만? 다른 받침은 뭐 죄 졌어? ‘ㄱ’이나 ‘ㅂ’은 왜 차별하는데? 이건 명백한 ‘받침 차별법’이라고!”


그는 유쾌한 냉소와 궤변을 섞어, 이 문법적 부조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키 180 이상이거나 INTJ인 사람만 입장 가능’이라고 써 붙인 클럽이랑 뭐가 달라? 나머지 사람들은 어쩌라고! 이건 시스템 설계가 잘못된 거야. 모든 받침 뒤에 ‘율’을 쓰거나, 아니면 전부 ‘률’로 통일해야지. 이게 뭐야, 대체!”



2. ‘예외’라는 이름의 인간미


그의 열정적인 ‘문법 투쟁’을 듣고 있던 보보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자기야, 진정해. 지금 맞춤법이랑 싸워서 이길 기세네.” 그녀가 그의 뺨을 꼬집었다. “당신, 정말… 그런 점이 귀여워 죽겠다니까. 세상 모든 게 그렇게 완벽한 논리랑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지?”


“당연한 거 아니야?” 그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시스템에 예외가 많아지면, 그건 시스템이 아니야. 그냥 ‘혼돈’이지. 나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는 그 ‘규칙’이 유일한 지도라고. 그런데 지도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 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잖아.”


보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를 깊이 이해하는 철학자의 시선이 돌아왔다.

“경훈아.”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말이야. 어쩌면… 그 ‘예외’야말로, 시스템을 인간적이게 만드는 유일한 장치 아닐까?”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봐.”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두음법칙. ‘로동(勞動)’이 ‘노동’이 되고, ‘락원(樂園)’이 ‘낙원’이 되는 거. 그것도 원래 한자음의 원칙(본질)을 무시하고, ‘발음하기 편하게’라는 인간의 ‘실존’을 택한 예외잖아. ‘냥(兩)’이나 ‘몇 년(年)’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고. 규칙이 너무 완벽하면, 사람이 숨을 못 쉬어. 그래서 가끔은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도 ‘이건 그냥 이렇게 하자’고 약속하는 거야. 그게 인간미 아니겠어?”


그녀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설계하는 그 완벽한 ‘정보 접근성’ 시스템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모든 사용자가 당신이 설계한 ‘가장 효율적인 경로(플랜 A)’로만 움직이길 바라지. 하지만 어떤 사용자는 그 경로가 불편할 수도 있고, 그냥 ‘삼천포’로 빠지고 싶을 수도 있어. 그 ‘예외’적인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시스템 아닐까?”


그녀의 말은 그의 견고했던 논리의 성벽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접근성’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표준’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3. ‘신립’과 ‘최린’의 아키텍처


“그리고 말이야.” 보보가 아이폰을 들어, 그가 검색했던 맞춤법 조항을 다시 띄웠다.

“이것 봐. 제11항 붙임 2. ‘외자로 된 이름을 성에 붙여 쓸 경우에도 본음대로 적을 수 있다.’ 신립(申砬)도 되고, 신입도 되고. 최린(崔麟)도 되고, 최인도 되고. 완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조항이네.”


김경훈은 이 조항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름 표기가 두 개나 허용돼? 그건 시스템의 ‘붕괴’야. 데이터가 오염된다고. ‘신립’과 ‘신입’은 내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야.”


“그렇지!” 보보가 신이 나서 말했다. “당신의 ‘시스템’에게는 그게 오류겠지만, ‘신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에게는 그게 자신의 ‘정체성’이잖아. 시스템의 편의를 위해서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본음)을 강제로 바꿔버리는 게 더 폭력적인 거 아니야? 그래서 이 규칙은 ‘예외’를 허용한 거야. ‘너의 이름은 나의 규칙보다 중요하다’고.”


그녀의 말은 마치 그가 잊고 있었던 ‘심의(心醫)’로서의 초심을 일깨우는 종소리처럼 울렸다. 그는 한때 사제가 되어,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고 싶어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재단하려 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깨달았다.


그는 보보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은 그 어떤 완벽한 시스템보다도 따뜻하고, 그 어떤 논리보다도 명쾌했다.

“... 보보.”

“응?”

“당신은 나한테… ‘-률’이 아니라 ‘-율’이야.”

“뭐래는 거야, 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 ‘ㄴ’ 받침 아니거든? 보보거든?”


“아니.”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모음’이잖아. 내 삶의 모든 날카로운 자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유일한 모음. 그래서 당신 뒤에는 언제나 가장 부드러운 ‘율’이 와야 해. ‘사랑율’, ‘행복율’, ‘보보율’. 이게 내 새로운 맞춤법이야. 내 시스템의 유일한 ‘예외’ 조항이지.”


보보는 그의 뜬금없고도 로맨틱한 선언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그의 등에 팔을 감고, 이 비논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남자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4. 예외를 위한 참여


그날 오후, 그는 결국 ‘고용률’과 ‘이직률’ 대신,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대구시 공공 키오스크 표준안’에 대한 정책 제안서였다. 그는 낮에 보보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그는 제안서의 마지막 항목에 이렇게 적었다.

‘… 따라서 현행 시스템은 고효율 사용자와 표준 사용자에게는 최적화되어 있으나, 고령자, 장애인, 혹은 기계에 익숙지 않은 수많은 ‘예외적 사용자’들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중략)… 진정한 접근성이란, 단 하나의 ‘완벽한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예외’를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편의를 위해 사용자의 ‘본음(고유한 사용 방식)’을 ‘두음법칙(표준화)’으로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립’과 ‘최린’을 모두 허용했던 한글 맞춤법의 지혜처럼, 시스템이 사용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합니다.’


그는 이 제안서가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참여)’임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오류를 불평하는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그 시스템의 ‘예외’들을 위해, 기꺼이 벽에 부딪히고 그 규칙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5. 주석: 우리 모두의 ‘리(理)’


그날 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복잡했던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유쾌함과 함께, 새로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목: 예외의 아키텍처, 혹은 ‘리(理)’를 위한 변론.

우리는 ‘규칙’에 복종하도록 훈련받는다. 하지만 ‘-율’과 ‘-률’의 법칙은 시스템이 결코 완벽할 수 없음을, 인간의 언어가 논리만으로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장 흥미로운 예외는 ‘그럴 리(理)가 없다’의 ‘리’다. 두음법칙에 따르면 ‘그럴 이가 없다’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리’라는 본음을 고집한다. 왜? 그것이 ‘이치(理)’니까. 때로는 규칙을 어기는 것이야말로, 더 큰 이치에 부합하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나의 장애는 이 사회의 표준화된 시스템에서 볼 때 명백한 ‘예외’이자 ‘오류’다. 하지만 나는 이 오류를 ‘극복’하거나 ‘수정’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나의 ‘본음’대로 살아가겠다.

결론: 시스템은 ‘-률’을 강요하지만, 나의 삶은 ‘-율’을 선택한다. 그리고 보보는 내 삶의 모든 견고한 규칙들을 기꺼이 무너뜨리는 가장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예외’다.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두음법칙이 무장해제된다.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그 어떤 논리도 힘을 잃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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