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Independence
우리는 ‘결핍’을 두려워한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남과 여, 음과 양의 결합만이 생명을 잉태하고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견고한 생물학적 도그마(Dogma)다. 짝이 없는 존재는 불완전하며, 그 끝은 필연적인 소멸일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 짓는다.
그러나 자연은 때때로 우리의 얄팍한 상식을 비웃는다. 태평양의 작은 도마뱀붙이 ‘레피도닥틸루스 루구브리스’는 그 증거다. 태풍에 휩쓸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암컷은 짝을 찾아 울부짖다가 죽어가는 대신, 자신의 몸을 재설계(Re-architecting)한다. 그녀는 수컷 없이 스스로 알을 낳고, 유전자를 혼합하여 클론이 아닌 ‘다양한’ 딸들의 제국을 건설한다. 결핍이 진화의 트리거(Trigger)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 놀라운 도마뱀의 생존 전략을, 21세기의 척박한 스타트업 정글에서 실천하고 있는 한 여성을 만난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홀로 선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된 한 남자의, 어느 습도 높은 오후의 기록이다.
1. 온실의 아키텍처, 혹은 고립된 섬
김경훈은 대구 달성군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스마트팜 유리 온실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미래 농업 데이터의 정보 접근성’에 관한 자문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11월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온몸을 감싼 것은 덥고 습한 아열대의 공기, 그리고 흙내음과 섞인 짙은 토마토 잎의 향기였다.
“킁킁.”
안내견 탱고가 낯선 냄새와 습도에 당황한 듯 재채기를 했다. 탱고는 ‘하네스 온’ 상태였지만, 바닥에 깔린 코코피트(야자 껍질 배지)의 푹신한 질감이 낯선지 발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김경훈은 이 공간의 소리를 읽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 파이프를 흐르는 양액의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그것은 흙바닥이 아닌, 철제 데크 위를 걷는 단단하고 리듬감 있는 소리였다.
“어서 오세요, 김경훈 박사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네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송이나 대표였다. 그녀는 이 스마트팜 스타트업 ‘그린 아일랜드’의 CEO이자 식물학자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힘이 있었고,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김경훈은 그녀에게서 연구실의 종이 냄새가 아닌, 흙과 뿌리와 비료의 냄새, 즉 ‘생존’의 냄새를 맡았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온실이… 거대한 섬 같군요. 바깥세상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김경훈의 인사에 송이나가 짧게 웃었다.
“섬 맞아요. 제가 처음 여기 내려왔을 때, 진짜 무인도에 떨어진 기분이었거든요. 투자자는 도망가고, 기술 이사는 그만두고, 남은 건 저랑 빚뿐이었죠.”
그녀는 그를 온실 중앙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때 저를 버티게 해 준 게, 도마뱀 한 마리였어요. 박사님, 혹시 ‘레피도닥틸루스 루구브리스’라고 아세요?”
2. 수컷의 부재, 혹은 진화의 시작
송이나 대표는 김경훈에게 따뜻한 허브차를 건네며, 그 기이한 도마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풍에 휩쓸려 무인도에 떨어진 암컷 도마뱀이 수컷 없이 스스로 유전자를 변형해 번식하고 군집을 이루는 이야기.
“수컷이 떨어지면 그냥 죽는대요. 적응을 못 해서.” 송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컷은 달라요. 그녀는 상황을 탓하지 않아요. 시스템(양성 생식)이 작동하지 않으면, 시스템을 바꿔버리죠(단위생식). 혼자서 알을 낳고, 심지어 감수 분열로 유전자를 섞어서 자신과 다른 다양한 딸들을 만들어내요.”
김경훈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뇌가 ‘연구 모드’로 빠르게 회전했다.
“놀랍군요. 보통 단위생식은 ‘클론(복제)’을 만들잖아요. 똑같은 개체만 있으면 바이러스 하나에 전멸하니까요. 그런데 혼자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한다니… 그건 생물학적으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아키텍처인데요.”
“맞아요.” 송이나가 끄덕였다. “저도 그때 깨달았어요. ‘아, 파트너가 없다고 죽는 게 아니구나. 내가 내 안의 시스템을 바꾸면 되는구나.’ 그래서 저도 도마뱀이 되기로 했죠.”
그녀는 자신의 회사를 ‘그린 아일랜드’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설명했다.
“남자들, 그러니까 기존의 농업 시스템이나 거대 자본(수컷)이 없어도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했죠. 하지만 지금 보세요.”
그녀는 손을 뻗어, (김경훈은 소리로 짐작했다) 주변의 무성한 토마토 숲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시스템, 전부 우리 여성 엔지니어들과 농학 박사들이 자체 개발한 거예요. 기존의 투박한 기계들 대신, 섬세하고 유연한 센서들을 심었죠. 우리는 클론을 만든 게 아니라, 우리만의 방식으로 다양성을 만들어냈어요.”
김경훈은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핍(고립)을, 새로운 문법(혁신)으로 번역해 낸 아키텍트였다. 15살에 시력을 잃고, 3년의 공백 끝에 ‘시각’ 없이 세상을 읽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던 김경훈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 겹쳐 보였다.
“대표님은….” 김경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미 그 무인도를 ‘낙원’으로 바꾸셨군요. 그 도마뱀붙이처럼.”
3. 탱고의 실존, 혹은 수컷의 한계
그때, 테이블 밑에서 얌전히 있던 탱고가 ‘크응’ 하고 코를 골았다. 녀석은 이 따뜻하고 습한 온실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송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탱고는 수컷인가요?”
“네, 아주 튼튼한 수컷이죠.” 김경훈이 탱고의 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탱고는 무인도에 떨어지면 큰일 나겠네요. 적응 못 하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니까.”
송이나의 농담에 김경훈은 폭소를 터뜨렸다.
“맞아요! 이 녀석은 제가 밥 안 주면 하루도 못 버틸걸요. 게다가 성격이 낙천적이라, 무인도에 떨어져도 ‘누군가 오겠지’ 하고 낮잠이나 잘 놈입니다. ‘적응’보다는 ‘대기’를 선택할 녀석이죠.”
탱고가 자기 욕을 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김경훈은 생각했다. 수컷(기존 시스템의 수혜자)은 시스템이 사라지면 무력해진다. 하지만 암컷(소외된 자, 결핍된 자)은 시스템이 사라지면, 스스로 시스템이 된다. 장애가 있는 자신이 비장애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정보의 구조’를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김경훈이 덧붙였다. “이 녀석이 비록 무인도 생존력은 꽝일지 몰라도, 제가 무인도에 갇혔을 때 저를 외롭지 않게 해 줄 유일한 존재인 건 확실합니다. 도마뱀붙이는 혼자서도 잘 살지만… 저는 탱고 없이는 이 넓은 온실에서 출구도 못 찾거든요.”
송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자립(Independence)이 고립(Isolation)은 아니니까요. 혼자 설 수 있어야, 비로소 누군가와 제대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거겠죠.”
4. 두 개의 칫솔, 그리고 로맨스의 완성
그날 저녁, 김경훈은 대구 시내로 돌아와 보보를 만났다. 보보는 그의 젖은 코트에서 나는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으며 코를 찡긋거렸다.
“자기야, 어디 정글이라도 다녀왔어? 타잔 냄새가 나는데.”
그들은 단골 이자카야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김경훈은 송이나 대표와 그 기묘한 도마뱀 이야기를 보보에게 들려주었다.
“혼자서 알을 낳고, 유전자를 섞어서 다양성을 만든대. 대단하지 않아? 완전한 자립이야.”
보보는 사케 잔을 기울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와, 그 언니 멋있네. 나랑 좀 통하겠는데? 나도 미국에서 10년 동안 혼자 구르면서 느꼈잖아. ‘아, 왕자님은 안 오는구나. 내가 왕이 돼야겠구나.’”
그녀는 김경훈의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나 없어도 무인도에서 혼자 ‘자가 번식’ 하면서 잘 살 수 있어?”
김경훈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했다.
“글쎄. 나는 수컷이잖아. 도마뱀 이론에 따르면, 나는 그냥 조용히 멸종할 운명이지.”
그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하지만… 내가 만약 그 섬에 떨어진다면, 나는 진화를 포기하고 구조 신호나 보낼래. 왜냐하면, 혼자서 완벽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보다, 당신이랑 같이 멍청하게 늙어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거든.”
보보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대왔다.
“합격. 나도 그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지만, 굳이 당신이랑 같이 사는 불편함을 선택한 거지. 그게 더… 스펙터클하니까.”
집으로 돌아온 김경훈은 욕실에 나란히 꽂힌 두 개의 칫솔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하나는 그의 것, 하나는 보보의 것.
그는 깨달았다. 송이나 대표의 ‘자립’은 위대했다. 하지만 김경훈과 보보의 ‘상호 의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아름다운 아키텍처였다. 도마뱀은 혼자서도 완벽해지기를 선택했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둘이 만나 서로의 빈틈을 채우기를 선택한다.
5. 주석: 자립의 아키텍처
그날 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제목: 자립(自立)의 아키텍처, 혹은 도마뱀의 교훈.
결핍은 진화의 엔진이다. 레피도닥틸루스 루구브리스는 고립된 섬에서 ‘수컷’이라는 외부 의존성을 제거하고, 스스로 완전한 시스템이 되었다. 송이나 대표 역시 자본과 기술의 결핍을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으로 극복했다.
이것은 ‘홀로 서기’의 위대함이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완벽한 자립만이 답인가?
나는 시각을 잃었기에 탱고에게 의존하고, 보이스오버에 의존하고, 보보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그 의존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과 더 단단하게 ‘연결’한다.
결론: 자립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립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함께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도마뱀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나의 결핍 덕분에, 보보라는 타인을 나의 세계로 기꺼이 초대할 수 있었으니까.
… 내일은 송이나 대표네 토마토를 주문해야겠다. 그 ‘독립적인’ 맛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