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Distance
우리는 ‘아름다움’을 찬양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11월의 캠퍼스는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황금빛 융단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사진을 찍고, 가을의 낭만을 이야기한다. 시각의 세계에서 은행나무는 완벽한 가을의 전령이다.
그러나 후각의 세계에서 은행나무는 ‘테러리스트’다.
그 고약한 악취. 잘 익은 은행 열매가 터지면서 내뿜는 부패한 치즈와 똥 냄새가 뒤섞인 그 지독한 현실. 우리는 눈으로 낭만을 소비하면서 코로는 현실을 부정하려 애쓴다.
하지만 식물학자들은 말한다. 은행나무는 1억 5천만 년을 살아남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인한 존재라고. 히로시마 원폭의 방사능 속에서도 가장 먼저 싹을 틔운 그 생명력은 어쩌면 그 지독한 냄새와, 암수가 서로 떨어져서도 사랑을 나누는 기묘한 ‘거리두기’의 아키텍처 덕분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 ‘거리(Distance)’와 ‘악취(Stench)’ 속에 숨겨진 생존의 비밀을, 코를 막고 걷던 한 남자가 묵묵히 빗자루질을 하는 한 노인을 통해 배우게 된, 어느 노랗고 냄새나는 오후의 기록이다.
1. 황금빛 지뢰밭
대학교 캠퍼스는 온통 노란색 필터를 낀 듯했다(보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지만 김경훈에게 이곳은 ‘황금빛 융단’이 아니라, 촉각과 후각을 위협하는 거대한 ‘지뢰밭’이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안내견 탱고가 마치 지뢰 탐지병처럼 긴장한 채 땅바닥을 주시하며 걷고 있었다.
“탱고, 조심해. 밟으면 끝장이야. 알지? 너 오늘 목욕해야 할 수도 있어.”
탱고는 영리했다.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물컹한 은행 열매들을 기가 막히게 피해서 김경훈을 안전한(냄새나지 않는) 경로로 유도하고 있었다. ‘좌측으로 15도, 다시 우측으로.’ 탱고의 움직임은 유려했지만, 김경훈의 코는 이미 괴로웠다. 공기 중에는 만추(晩秋)의 건조한 냄새 대신, 바닥에서 으깨진 은행 열매들이 내뿜는 시큼하고 쿰쿰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우, 냄새….”
지나가던 학생들이 코를 막으며 종종걸음을 쳤다. 김경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보이는 놈들은 좋겠어. 코를 막을 손이라도 남으니까. 나는 지팡이 쥐랴, 탱고 줄 잡으랴, 코 막을 손도 없는데. 이건 완벽한 신체적 불평등이야.’
그는 이 은행나무가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1억 5천만 년. 공룡이 멸종할 때도 살아남은 이 지독한 생명체. 어쩌면 그 생명력의 원천은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이 ‘악취’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완벽한 ‘접근 거부(Access Denied)’의 아키텍처였다.
그때, 규칙적이고 거친 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스삭, 스삭, 촥-’
대나무 빗자루가 아스팔트 바닥을 긁는 소리.
2. 빗자루의 마에스트로
소리의 주인은 인문대학 앞을 청소하고 있던 경비 및 조경 담당, 강 주임님이었다. 김경훈은 그를 ‘캠퍼스의 정원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꼿꼿한 허리를 가진,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분이었다.
“강 주임님, 안녕하세요.” 김경훈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사했다.
빗자루 소리가 멈췄다.
“어, 김 박사. 조심해서 오게. 여기 지금 ‘지뢰’ 천지야.”
그의 목소리는 걸걸했고, 은행 냄새가 밴 작업복 특유의 냄새가 났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 냄새… 정말 지독하네요.”
“말도 마. 아주 징글징글해.” 강 주임이 혀를 찼다. “학생들은 좋다고 사진 찍고 난리지? 그거 다 우리가 쓸어 담아야 해.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다 썩어가는 게 은행이야.”
그는 빗자루로 바닥을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근데 김 박사, 그거 아나? 이놈들이 왜 이렇게 냄새가 고약한지?”
“글쎄요. 벌레 꼬이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것도 맞지. 근데 더 웃긴 건 말이야.” 강 주임이 빗자루를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이놈들이 암수가 따로 있잖아. 저기 저놈은 수놈, 요놈은 암놈. 서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어도 기가 막히게 꽃가루를 날려서 새끼(열매)를 쳐요. 아주 지독한 연애지.”
김경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놈들이 서로를 향해 ‘기운다’는 거야. 마주 보고 싶어서.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닿고 싶은 거지.”
강 주임은 바닥에 떨어진 으깨진 열매 하나를 발끝으로 가리켰다(물론 김경훈은 소리로 짐작했다).
“이 냄새나는 껍질 속에, 아주 단단하고 하얀 씨앗이 있어. ‘은빛 살구(銀杏)’라는 게 그거지. 겉은 똥 냄새가 나도, 속은 약(藥)이야. 티베트 승려들은 잠 쫓으려고 먹고,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기침 멎으라고 먹고. 썩어서 문드러져야, 비로소 그 귀한 게 나오는 법이지.”
강 주임은 다시 빗자루를 움직였다. 그는 탱고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 한가운데의 은행 열매들을 깨끗하게 양옆으로 밀어내 ‘길’을 터주었다.
“자, 이제 지나가게. 개 발바닥에 묻으면 씻기 힘들어.”
김경훈은 강 주임이 만들어준 그 깨끗한 ‘길’을, 탱고와 함께 걸어갔다. 빗자루가 만들어낸 그 길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보행을 위한 ‘배려’이자, 악취 속에서 알맹이를 찾아내는 ‘지혜’의 길이었다.
3. 거리(Distance)의 역설, 혹은 시간차 로맨스
그날 저녁, 그는 보보와 함께 캠퍼스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노란 은행잎을 비추자, 캠퍼스는 낮과는 또 다른 낭만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물론 냄새는 여전했지만, 차가운 밤공기가 그것을 조금은 눌러주고 있었다.)
“자기야, 오늘 진짜 예쁘다.” 보보가 감탄했다. “온 세상이 노란색이야. 당신이 이걸 볼 수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대신 나는 냄새를 맡잖아.” 김경훈이 짓궂게 웃었다. “이 지독한 현실의 냄새.”
그는 보보에게 낮에 강 주임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암수딴그루,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는 나무들, 그리고 악취 속에 숨겨진 은빛 씨앗 이야기.
“와….” 보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거 되게 로맨틱하면서도 슬프네. 수백 미터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다니.”
“그렇지.” 김경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비슷해.”
“뭐가? 우리 장거리 연애 안 했잖아.”
“공간적 거리는 아니었지만, ‘시간적 거리’가 있었지.”
그는 10년 전, 미시간의 눈보라 속에서 ‘엘리야’로 살아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미국 어딘가에서 로스쿨 공부를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과거의 보보’를 떠올렸다.
“10년 전, 우리는 지구 반대편도 아니고 같은 미국 땅에 있었어. 하지만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지. 당신은 당신의 뿌리를 내리느라 바빴고, 나는 내 껍질을 깨느라 바빴으니까.”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거리’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작년 4월에 만났을 때 그렇게 강렬하게 서로에게 기울어진 거 아닐까? 우리가 각자 10년 동안 겪어낸 그 썩어 문드러지는 시간들, 그 지독한 악취 같은 고통들이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단단한 알맹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지.”
보보는 그의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그의 손을 꽉 잡았다.
“... 말 되네. 당신의 그 블랙 코미디 같은 인생과, 나의 지독했던 유학 생활이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서도 서로 못 알아봤을 거야.”
그녀는 김경훈의 주머니에서 볶은 은행 몇 알이 담긴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강 주임이 낮에 “집에 가서 색시랑 까먹어”라며 쥐여준 것이었다.
“자, 먹어봐. 이게 그 10년의 거리를 건너온 보석이야.”
그녀는 껍질을 깐 은행 알을 김경훈의 입에 넣어주었다.
“음….” 김경훈이 씹으며 미소 지었다. “맛있다. 쫄깃하고, 고소하고… 약간 쌉싸름한 게, 진짜 약 같네.”
“그치? 티베트 승려들은 이걸로 잠을 쫓았다는데, 우리는 이걸로… 뭘 할까?”
“글쎄. 늦게 만난 만큼, 잠들지 말고 더 사랑하라는 계시 아닐까?”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냄새나는 은행나무 아래였지만, 그녀의 품에서는 오직 따뜻하고 향기로운 냄새만이 났다.
“우리는 더 이상 떨어져 있지 말자. 나는 그냥… 당신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버릴래. 쓰러질 때까지.”
“이미 기울었잖아, 이 바보야.”
4. 주석: 악취의 아키텍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김경훈은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사유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탱고는 현관에서 발을 씻고(보보가 꼼꼼하게 씻겨주었다), 피곤한 듯 뻗어 있었다.
‘제목: 거리(Distance)의 아키텍처, 혹은 시간차의 미학.
은행나무는 역설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색(노랑)과 가장 추악한 냄새(악취)를 동시에 가진다. 하지만 그 악취는 자신의 씨앗(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다.
암수 나무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향해 기운다.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지향(Orientation)’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나와 보보는 10년 전에는 서로 몰랐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하게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그 ‘모름’의 시간이 그 ‘거리’가 지금의 ‘만남’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결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노란 잎’에 현혹되지만, 진짜 본질은 코를 찌르는 ‘열매’ 속에 있다. 썩어 문드러지는 껍질(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단단하고 푸른 ‘생명(사랑)’을 얻을 수 있다.
… 그나저나, 강 주임님이 주신 은행, 너무 많이 먹었나. 배가 좀 아픈데. 은행에는 독성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이것도 과유불급(055)인가.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