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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의 아키텍처

The Architecture of Reflection

by 김경훈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 없이는 단 한순간도 우리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유아기에는 부모의 눈동자에서 청소년기에는 친구들의 환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상(像)을 조립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우리는 나의 참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왜곡해 줄 단 하나뿐인 거울, ‘연인’을 찾아 헤맨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사실 상대방을 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비친 ‘가장 근사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는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인 고백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평행한 두 개의 거울이 마주 보며 서로의 상을 무한히 복제해 내는 그 아찔하고도 영원한 ‘마법의 시간’과 같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거울이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당신의 눈이 닫혀있다면. 당신은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시각적 피드백이 차단된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비치고, 어디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가.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줄 새로운 ‘반사판’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늦가을 저녁의 기록이다.



1. 엘리베이터, 혹은 무한의 회랑


대구의 한 백화점. 김경훈은 10층 식당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주말 저녁이라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좁은 밀실, 섞이는 향수 냄새, 사람들의 억눌린 숨소리.


그의 곁에는 안내견 탱고가 사람들의 다리 숲 사이에서 얌전히 엎드려 있었고, 그의 팔짱을 낀 보보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기야, 여기 사방이 거울이야. 완전 ‘거울 지옥’이네.”


김경훈은 손을 뻗어 차가운 벽면을 만져보았다. 매끄럽고, 차갑고, 단단한 유리. 그는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 사방에 붙은 거울들이 만들어내는 그 기묘한 광경을 상상했다. 마주 보는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또 그 거울 속에 비치고, 다시 그 속에 비치며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의 회랑’.


“어때?” 그가 짓궂게 물었다. “거울 속에 비친 김경훈들은 다 잘생겼어? 아니면 다들 피곤해 보이나?”


“글쎄.” 보보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일단 맨 앞에 있는 김경훈은 꽤 근사한데, 저기 10번째 뒤에 있는 김경훈은 좀 멍청해 보이는데? 침 흘리는 것 같기도 하고.”


“와, 너무하네. 내 ‘자아(Self)’를 그렇게 왜곡시키다니.”


그는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서늘했다. 그는 거울을 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오늘 아침 면도는 제대로 했는지, 넥타이는 삐뚤어지지 않았는지, 지금 짓고 있는 미소가 자연스러운지, 오직 ‘감각’과 ‘타인의 말’에 의존해 짐작할 뿐이다. 그에게 세상은 ‘반사’되지 않는다. 그저 ‘흡수’될 뿐이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인파에 휩쓸려 밖으로 나왔다.


2. 소리의 거울, 혹은 에코(Echo)


그들은 예약해 둔 초밥집의 조용한 룸에 마주 앉았다. 따뜻한 녹차 향과 신선한 생선 냄새, 그리고 밥알의 식초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자기야.” 보보가 녹차를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생각난 건데. 어떤 책에서 그러더라. 사랑은 ‘좋은 거울’을 발견하는 거래.”


“좋은 거울?” 김경훈이 젓가락을 놓으며 흥미를 보였다. “백설 공주 왕비가 찾던 그런 거?”


“아니, 바보야.” 그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나를 비췄는데,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 거울 말이야. 우리는 상대방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대. 그게 ‘반했다’는 거래. 두 거울이 서로를 비추면 무한한 지평이 열리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통해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 그게 사랑의 아키텍처래.”


김경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 정의에 따르면, 그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는 보보의 눈을 볼 수 없다. 그는 그녀의 동공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럼 나는?” 그가 짐짓 태연한 척, 그러나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신 눈을 볼 수 없는데. 그럼 나는 ‘거울’이 없는 건가? 나는 영원히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뱀파이어 같은 존재야?”


보보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의 농담 속에 숨겨진, 15살 이후 그가 겪어왔을 존재론적 불안을 감지했다.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지.”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에게는 다른 거울이 있잖아.”

“다른 거울?”


“응. ‘소리의 거울’.” 그녀가 그의 손등을 문질렀다. “당신은 ‘메아리(Echo)’를 듣잖아. 당신이 나한테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하는 그 목소리의 떨림, 톤, 온도. 당신은 그걸 통해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잖아. 그게 당신의 거울이야.”


김경훈은 그녀의 말에,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는 시각적 반사를 잃었지만, 청각적 반사, 즉 ‘공명(Resonance)’을 얻었다. 그는 자신이 던진 말이 행동이 타인이라는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반향음’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형태를 가늠한다.


“그리고,” 보보가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거울이 하나 더 있지.”

“뭐?”

“탱고.”



3. 가장 투명한 거울, 탱고


김경훈은 발치에 엎드려 있는 탱고를 내려다보았다(마음의 눈으로). 녀석은 지금 주인이 편안해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자신도 배를 깔고 릴랙스 하고 있었다.


“탱고는” 보보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왜곡 없는 거울이야. 당신이 불안하면 탱고도 불안해하고, 당신이 당당하게 걸으면 탱고도 가슴을 펴고 걷잖아. 녀석은 당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반사해 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탱고를 보면 알 수 있어.”


김경훈은 손을 내려 탱고의 부드러운 귀를 만졌다. 탱고가 ‘킁’ 하고 반응하며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개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탱고가 줄을 팽팽하게 당길 때 그는 자신의 조급함을 깨달았고, 탱고가 멈춰 설 때 그는 자신의 망설임을 감지했다. 탱고는 그에게 ‘나’를 비춰주는 가장 정직한 생체 거울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 김경훈이 미소 지었다. “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거울 부자였네. 소리의 거울도 있고, 털 달린 거울도 있고.”


“그리고,” 보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있잖아. 촉각의 거울.”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만져봐. 내가 지금 당신을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당신이라는 남자가 내 얼굴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야.”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올라간 입꼬리와, 따뜻한 뺨의 온도를 읽었다. 그 촉각의 거울 속에 비친 김경훈은 꽤나 근사하고 행복한 남자였다.



4. 결별의 예감, 혹은 아키텍처의 유지보수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밤공기가 차가웠다.

보보가 문득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그러더라. 두 사람이 항상 똑같은 속도로 걷는 건 아니라고. 방향이 달라지거나, 거울이 더 이상 나를 비추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온대. 그게 이별이래. 거울이 깨지는 거지.”


김경훈은 그녀의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알 것 같았다. 10년의 미국 생활, 박사 학위, 그리고 장애인 연인. 그들의 속도와 방향은 객관적으로 너무나 달랐다.


“보보.” 그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거울은 깨질 수 있어. 유리니까.”

그는 그녀를 향해, 뻔뻔하고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유리가 아니야. 나는 ‘방음벽’이야. 소리의 거울은 안 깨져. 그냥 좀 시끄러울 뿐이지.”


그는 소설의 현자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되면, 그때는 탱고가 짖을 거야. ‘어이 둘이 떨어지면 내가 케어하기 힘들어! 붙어!’라고. 우리는 거울 두 개가 마주 보는 시스템이 아니야. 우리는 나, 당신, 탱고라는 세 개의 점이 연결된, 가장 안정적인 ‘삼각형’의 아키텍처라고. 안 무너져.”


보보는 그의 궤변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말이나 못 하면. 알았어, 방음벽 씨. 튼튼하게 잘 버텨봐.”



5. 주석: 반사의 아키텍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김경훈은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사유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제목: 반사(反射)의 아키텍처, 혹은 거울 없는 자의 초상.

우리는 시각적 거울을 통해 자아를 확인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시각은 외면을 비추지만, 관계는 내면을 비춘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기에, 거울을 볼 수 없다. 대신 나는 타인의 목소리(반향)와, 탱고의 움직임(반응)과, 보보의 체온(접촉)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재구성한다. 이것은 시각적 이미지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고 따뜻한 홀로그램이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좋은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거울은 유리로 만들 필요가 없다.

결론: 나의 거울은 깨지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와 온기로 지어진 집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보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고, 그녀가 웃음으로 답하는 한, 내 존재의 아키텍처는 무한히 확장된다. 거울 속에 거울이 비치듯, 소리 속에 소리가 메아리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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