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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의 아키텍처

The Architecture of Synchronization

by 김경훈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빙산’에 비유하곤 한다. 수면 위로 드러난 10퍼센트의 ‘의식’과, 캄캄한 심해에 잠겨 있는 90퍼센트의 ‘무의식’.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우리는 고작 그 10퍼센트의 좁은 영토에서 서성일뿐이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차가운 바다 밑으로 잠수해 그 거대한 90퍼센트의 대륙에 깃발을 꽂아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그 심해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미러링(Mirroring)’이라 부른다. 상대의 거울이 되는 것. 상대가 턱을 문지르면 나도 문지르고, 물을 마시면 나도 마신다. 이 단순한 모방 행위는 상대의 무의식에 ‘나는 당신과 같은 부류입니다’라는 안심의 신호를 보내고, ‘의심’과 ‘경계’라는 견고한 방화벽을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완벽한 해킹 기술이다. 그러나 이 기술에는 치명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상대를 ‘보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상대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이 방화벽을 뚫을 수 있는가. 시각 정보가 차단된 해커는 과연 어떤 코드를 입력해야 저 깊은 무의식의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 보이지 않는 ‘동조’의 아키텍처를 실험하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에서 기묘한 첩보전을 벌인 한 남자에 대한, 어느 쌀쌀한 저녁의 기록이다.



1. 식탁 위의 해커


대구 수성구의 한 조용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은은한 조명 아래,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김경훈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보보의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연구 모드’였다. 그의 뇌는 고성능 마이크처럼 감도를 최대로 높이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주인의 뜬금없는 긴장감을 감지한 안내견 탱고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엎드려 있었다.


그는 오늘 읽은(들은) 심리학 이론을 실전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상대의 무의식으로 들어가기’. 그는 보보의 90퍼센트를 해킹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턱을 괴고 있는지, 머리카락을 넘기는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인 ‘청각적 미러링’을 시도했다.


‘달그락.’

보보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김경훈도 0.5초의 시차를 두고, 자신의 포크를 접시 위에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꿀꺽.’

보보가 물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김경훈도 즉시 물 잔을 찾아 입으로 가져갔다.


‘후우…’

보보가 식사 도중 작게 한숨을 쉬었다.

김경훈도,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사람처럼, 깊고 그윽하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묘한 모방 게임은 1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꽤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리듬에 동조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무의식 속에 ‘우리는 하나’라는 코드를 심고 있는 중이었다.


“... 자기야.”

보보의 목소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리듬을 깨고 훅 들어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인 황당함이 묻어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냐?”


김경훈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물 잔을 들었다.

“뭐가? 난 그냥 식사 중인데.”


“웃기지 마.” 그녀가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까부터 왜 나를 따라 해? 내가 물 마시면 마시고, 멈추면 멈추고. 무슨… 고장 난 AI 스피커야? 아니면 앵무새 훈련해?”



2. 거울 뉴런, 혹은 엇박자의 춤


작전은 실패했다. 김경훈은 멋쩍게 웃으며 물 잔을 내려놓았다.

“들켰네. 역시 철학 박사의 눈썰미는 못 속이나.”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막는 ‘의심의 장벽’을 뚫기 위한 미러링 기법에 대해.

“책에서 그러더라고. 상대의 버릇을 흉내 내면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나는 당신과 같은 부류입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이랑 ‘동기화(Synchronization)’ 좀 해보려고 했지.”


보보는 턱을 괸 채(이건 김경훈이 상상한 모습이다),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재밌네. 근데 자기야, 당신의 그 ‘청각적 미러링’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하나 있어.”

“버그?”


“응. 당신은 지금 내 ‘행동’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내 ‘소리’를 따라 하고 있잖아. 그건… 뭐랄까.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메아리를 듣는 기분이야. 그것도 반 박자 늦게 울리는 촌스러운 메아리.”


그녀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진짜 동조는 박자를 맞추는 게 아니야. ‘호흡’을 맞추는 거지. 당신이 10년 전 마이클이랑 농구할 때, 공을 굴려줬던 거 기억해? 그때 마이클이 당신 흉내를 냈어? 아니잖아. 그 친구는 당신의 ‘상황’에 동조했기 때문에,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속도로 공을 굴려준 거야. 그게 진짜 미러링이지.”


김경훈은 미시간의 농구 코트를 떠올렸다. 그랬다. 마이클과 조쉬는 그의 행동을 모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김경훈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보보가 짓궂게 덧붙였다. “내가 아까 한숨 쉰 건, 파스타가 너무 뜨거워서 식히려고 쉰 건데, 당신은 왜 거기서 나라 잃은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 그건 공감이 아니라, 그냥 ‘오버 액션’이야, 이 바보야.”



3. 탱고의 아키텍처, 혹은 침묵의 동조


김경훈은 그녀의 지적에 폭소를 터뜨렸다.

“아, 뜨거워서 그런 거였어? 난 또 당신이 ‘존재의 불안’이라도 느낀 줄 알았지.”


그때, 테이블 밑에서 무언가가 김경훈의 발등을 묵직하게 눌러왔다. 탱고였다. 녀석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 자신의 턱을 주인의 발등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것 봐.” 김경훈이 식탁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고수는 여기 있었네.”


탱고는 김경훈이 웃으면 꼬리를 치고, 김경훈이 긴장하면 귀를 세운다. 하지만 녀석은 주인의 행동을 흉내 내지 않는다. 탱고는 주인의 ‘감정’을 읽고, 그 감정의 주파수에 자신의 존재를 맞춘다. 주인이 슬플 때는 조용히 체온을 나눠주고, 주인이 기쁠 때는 함께 펄쩍 뛴다.


“탱고는… 내가 물을 마신다고 따라 마시지 않아.” 김경훈이 탱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신,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 녀석도 같이 긴장하고, 내가 편안해지면 녀석도 늘어지지. 이게 진짜 당신이 말한 ‘호흡’인가 봐.”


보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라포(Rapport)’야. 억지로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은 공기 속에서 같이 숨 쉬는 거. 당신이랑 나처럼.”



4. 심해로의 다이빙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11월의 밤공기는 찼지만,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김경훈은 더 이상 보보의 발소리에 맞춰 걷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체온과 속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자기야.” 그가 물었다. “그럼 내 10퍼센트의 의식이 당신의 그 90퍼센트 심해에 도달하긴 한 거야?”


보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글쎄. 이미 도착해서 깃발 꽂고 텐트까지 친 것 같은데?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엉뚱한 짓 할 때마다… 묘하게 안심이 되거든. ‘아, 이 남자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나랑 통하려고 이렇게까지 애쓰는구나’ 싶어서.”


그녀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의 그 어설픈 미러링이 내 무의식의 방화벽을 해제하는 비밀번호였나 봐. ‘바보’라는 비밀번호.”


김경훈은 그녀의 말에, 밤하늘을 향해(보이지 않지만)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하려던 정교한 ‘동조의 아키텍처’가 무너진 자리에서 훨씬 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랑의 아키텍처’를 발견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5. 주석: 동조의 아키텍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김경훈은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엉뚱했던 실험에 대한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동조(同調)의 아키텍처, 혹은 엇박자의 미학.

의식은 10%, 무의식은 90%. 우리는 그 거대한 빙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미러링’이라는 기술을 쓴다.

오늘 나는 ‘소리’를 흉내 내며 그녀의 심해로 잠수하려 했지만, 얕은 수면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모방은 ‘기술’이지만, 공감은 ‘상태’다.

탱고는 흉내 내지 않는다. 그는 그저 곁에 존재하며, 나의 온도를 공유한다. 그것이 진짜 동조다.

결론: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호흡’을 읽고, 나의 호흡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다. 비록 가끔 엇박자가 나더라도, 그 어긋남마저 웃음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완벽한 합주(Ensemble)다.

… 다음엔 국수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후루룩 소리까지 따라 하면, 보보가 질색하며 도망갈지, 아니면 박장대소할지 궁금하니까. 어느 쪽이든, 그녀의 무의식은 흔들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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