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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아키텍처

The Architecture of Language

by 김경훈


우리는 언어를 ‘도구’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전달하고, 세상을 묘사하는 편리한 수단이라고. 그러나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집’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는 존재의 집(The house of Being)’이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벽과 지붕이 결정된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벙어리장갑’, ‘장님’, ‘절름발이’ 같은 단어들은, 단순한 기호(Sign)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결함’으로 규정하고, ‘비정상’의 영역으로 추방해 버리는, 가장 견고하고도 폭력적인 아키텍처다. 우리는 이 낡고 썩은 집에서 살아가며, 그것이 ‘차별’인 줄도 모른 채 ‘관용구’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넘어간다.


이것은 그 언어의 아키텍처를 해체하고, ‘배려’가 아닌 ‘존중’이라는 새로운 자재로 다시 지으려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15살에 빛을 잃고 ‘맹인’이라 불렸던 그가, 20년 후 ‘시각장애인 연구자’가 되어, 세상을 향해 “내 이름을 똑바로 불러달라”고 외치는, 어느 늦가을 오후의 조용한 혁명이다.



1. 꽃샘추위, 혹은 ‘말’의 한파


때아닌 추위가 대구를 덮쳤다.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거리에 남은 마지막 은행잎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 김경훈은 대학교 북문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인근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장애 이해 교육’에 특별 강사로 초빙되어 가는 길이었다.


그의 곁에는, 추위를 타는지 평소보다 더 바싹 붙어 걷는 안내견 탱고가 있었다. 김경훈은 두툼한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신호등의 음향 신호기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날씨 진짜 춥다.”

그의 등 뒤에서 젊은 여성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나 오늘 장갑 안 가져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벙어리장갑 끼니까 따뜻하고 좋네.”


‘벙어리장갑’.


김경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는 그 단어가 주는 껄끄러운 촉감을 느꼈다. ‘손가락이 묶여 말을 못 하는 듯한 모양’을 빗댄 그 낡은 비유. 그것은 단순히 장갑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불편함’을 희화화하는, 무의식적인 폭력이었다.


그는 15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들었던 수많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장님’, ‘소경’, ‘불구’. 그 단어들은 그의 존재를 ‘결핍’으로 규정짓는 차가운 쇠창살이었다. 그는 그 창살을 부수고 나오기 위해 20년을 싸웠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건조하지만 존중이 담긴 법적 용어를 획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님’ 소리를 견뎌야 했던가.


“아, 신호 바뀌었다. 가자.”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김경훈은 탱고의 하네스를 꽉 쥐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볼을 때렸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것은, 여전히 우리 일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떠도는, 저 ‘차별의 언어’들이었다.



2. 교실의 아키텍처, 혹은 ‘정상’이라는 환상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김경훈은 그들의 들뜬 숨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로 그것을 느꼈다)이 그와 탱고에게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김경훈이라고 합니다.” 그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 잘생긴 친구는 제 눈이 되어주는 탱고고요.”

“와아아!” 아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칠판 앞에 섰다. 그는 오늘, 아이들에게 ‘점자’나 ‘흰 지팡이’ 사용법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어’를 가르치러 왔다.


“여러분.” 그가 물었다. “오늘 날씨가 춥죠? 혹시 장갑 끼고 온 사람 있어요?”

“저요! 저요!” 여기저기서 손드는 소리가 났다.

“무슨 장갑 끼고 왔어요?”

“저는 털장갑이요!”

“저는 벙어리장갑이요!” 한 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김경훈은 빙긋 웃었다. 그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어른들이 만든 ‘나쁜 집(언어)’에서 배운 대로 말했을 뿐이니까.

“그렇군요. 따뜻하겠네요. 그런데 여러분, 그 ‘벙어리’라는 말이, 사실은 조금 아픈 말이라는 거 알고 있나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벙어리’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에요. 우리가 친구를 놀릴 때 쓰는 나쁜 말처럼요. 그래서 요즘은 그 장갑을 ‘손모아장갑’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손가락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따뜻하니까요. 어때요? ‘손모아장갑’, 이름 예쁘지 않나요?”


“네에!” 아이들이 합창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선생님 같은 사람을 ‘장님’이나 ‘맹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시각장애인’이라고 불러요. 눈이 조금 불편할 뿐, 여러분이랑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이들을 향해(정확히는 그들의 기척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뭐라고 부를까요? ‘정상인’일까요?”


“정상인 아니에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럼 장애인은 ‘비정상’인 건가요?” 김경훈이 되물었다. 아이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그냥 ‘비(非)장애인’이에요. 장애가 ‘없을’ 뿐이지, 더 우월하거나 정상적인 건 아니니까요. 안경 쓴 사람과 안 쓴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그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어진 ‘차별의 아키텍처’를, 벽돌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해체하고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의 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름’과 ‘공존’이라는 새로운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3. 꿀 먹은 벙어리, 혹은 침묵의 무게


강연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온 그는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옆 자리의 선생님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아휴, 김 선생님. 아까 교감 선생님한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완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더만.”


김경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방금 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그 말이,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여과 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

말문이 막힌 상황을 묘사하는 관용구. 하지만 그 말은, 언어 장애인의 ‘침묵’을, 답답하고 어리석은 상황에 빗대는 잔인한 은유였다.


그는 병원에서 처음으로 ‘실명’을 선고받았던 날을 기억했다. 의사의 설명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아버지를 보고 ‘꿀 먹은 벙어리 같다’고 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모욕이었을까.


그는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심의(心醫)’로서, 이 병든 언어를 치료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피로감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말들과 싸워야 하는, 이 끝없는 전쟁.


그때, 누군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 박사님! 고생하셨습니다.”

보보였다. 그녀는 오늘 근처 대학에서 강의가 있었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활기찬 에너지로 교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단번에 깨뜨렸다.


“어, 보보.” 김경훈이 힘없이 웃었다.

보보는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대뜸 옆 자리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경훈 연구원 보호자… 가 아니라, ‘파트너’입니다.” 그녀가 류귀복처럼 뻔뻔하고 유쾌하게 농담을 던졌다. 선생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김경훈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래? 표정이 썩었네. 누가 또 ‘장애우’라고 불렀어?”

“아니. 그냥… ‘꿀’을 좀 많이 먹은 것 같아서.”

“뭐?”


김경훈은 그녀에게 방금 들었던 대화를, 그리고 자신이 느꼈던 무력감을 털어놓았다.

“... 세상은 쉽게 안 바뀌네, 보보. 내가 아무리 ‘손모아장갑’을 외쳐도, 어른들은 여전히 ‘벙어리’를 찾고 있어.”



4. 언어의 재건축, 그리고 로맨스의 문법


보보는 그의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 끝 창가에 서서, 그녀는 늦가을의 황량한 운동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야. 언어는… ‘습관’이야. 아키텍처로 치면, 아주 오래된 구옥(舊屋) 같은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지적이었다.

“구조가 엉망이고, 단열도 안 되고, 곳곳에 곰팡이(차별)가 슬어 있어. 근데 사람들은 거기서 평생을 살아서, 그게 불편한 줄도 몰라. 그걸 하루아침에 부수고 새로 지으라고 하면, 다들 반발하지. 갈 곳이 없으니까.”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당신은 오늘, 아이들의 머릿속에 ‘새 집’을 짓기 위한 ‘벽돌’ 하나를 놓은 거야. ‘손모아장갑’. 그 예쁜 단어 하나가, 언젠가는 그 아이들의 언어 습관을, 그들의 세계를 바꿀 거야.”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그 예민함이 좋아. 남들이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단어의 가시들을, 당신은 아파하고, 뽑아내려 하잖아. 그게 당신이 가진 ‘품격’이야.”


그녀의 말에, 김경훈의 마음속에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보보.”

“응.”

“당신은… 나한테 ‘비(非)장애인’이야?”

“아니.” 그녀가 즉답했다. “나는 그냥 ‘보보’지.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


그는 웃었다.

“그래. 맞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결국은 다 시스템이 만든 분류일 뿐이지. 우리는 그냥…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人)’일뿐이고.”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당신이 내 ‘언어’를 알아줘서.”

“당연하지. 내가 당신 ‘전담 통역사’잖아.”



5. 주석: 언어의 아키텍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보보가 운전하는 옆자리에서, 김경훈은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사유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제목: 언어의 아키텍처, 혹은 존중의 시작.

우리는 무심코 ‘벙어리’, ‘장님’, ‘절름발이’를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결핍’으로 규정하는 낡고 폭력적인 아키텍처다.

‘장애를 앓다’가 아니라 ‘장애를 갖다’.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 ‘장애우’가 아니라 ‘장애인’.

이 사소해 보이는 단어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만들고, 결국 세상의 온도를 바꾼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차별의 언어를 쓰는 사람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결론: 나는 오늘 ‘손모아장갑’이라는 단어를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그것은 작은 시작이지만, 언젠가 그 아이들이 만들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평등한 곳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보보가 나를 ‘장애인’이 아닌 ‘자기야’라고 불러줄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한 ‘나’가 된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차별의 언어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완벽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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