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Efficiency
우리는 ‘더 많이(More)’라는 이름의 신을 숭배한다.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압력, 더 많은 데이터. 우리는 이 무한한 투입(Input)이 곧 무한한 산출(Output)로 이어질 것이라는 20세기 공장의 낡은 신화를 맹신한다. 효율은 ‘한계’를 모르는 우상향 하는 직선 그래프여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더 많이’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더 적게(Less)’를, 심지어 ‘파괴(Destruction)’를 낳는다면 어떨까.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이반 일리히는 이 지독한 역설을 ‘일리히의 법칙’이라 명명했다. 인간의 활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하며 나아가서는 ‘역효과’를 낸다. 농부의 노동을 두 배로 늘려도 밀의 생산량은 두 배가 되지 않으며, 노동자에게 가하는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생산성은 오히려 파괴적인 스트레스와 시스템 붕괴로 전환된다. 1960년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에게 무한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은 이 단순한 진실을 외면했다.
이것은 ‘공생(Conviviality)’을 위한 도구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몸마저도 ‘공장’으로 착각하고, 스스로에게 무한한 압력을 강요하며, 그 ‘한계’의 절벽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던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땀에 전 늦가을 오후의 기록이다.
1. 막다른 골목, 혹은 ‘수확 체감’의 벽
대구 시내의 한 대형 실내 클라이밍 짐.
공기는 바깥의 차가운 도시 냄새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기묘한 ‘아드레날린’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암벽화의 고무 냄새, 초크 가루의 매캐하고 건조한 냄새, 그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와 땀 냄새.
김경훈은 이 수직의 ‘아키텍처’ 한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그는 지금, ‘연구 모드’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 모드’였다.
3
그의 곁에는 이 모든 소란함에 익숙해지려 애쓰는 안내견 탱고가, 짐 구역 한 편의 고정된 앵커에 묶인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은 ‘비번 모드’였지만, 자신의 주인이 10미터 상공에서 끙끙대며 위험한(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반복하자,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이따금씩 ‘크으응…’ 하고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김경훈의 입가에는 평소의 유쾌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복잡한 시스템의 오류와 씨름하는 엔지니어의, 깡마르고 날카로운 집중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13b’ 난이도의 붉은색 오버행(overhang) 루트, 일명 ‘지옥의 처마’라고 불리는 벽과 40분째 씨름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 루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루트를, 그의 손끝이라는 가장 정교한 스캐너로, 수십 번 ‘읽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홀드(Hold)의 위치, 형태, 깊이, 그리고 질감을 자신의 뇌 속에 ‘촉각 지도(Tactile Map)’로 완벽하게 렌더링해 두었다. 그의 뇌는 이 루트를 공략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이미 설계했다.
‘왼손으로 핀치 그립, 오른발을 아웃사이드 엣지로 딛고, 무게 중심을 왼쪽으로 이동시킨 후, 오른손을 크로스로 뻗어 다음 크림프 홀드를 잡는다.’
완벽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그 완벽한 ‘이론’을 배신하고 있었다.
“... 젠장!”
그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는 네 번째 시도 만에, 바로 그 마지막 크럭스(Crux) 구간에서 손가락 힘이 풀리며, 로프에 매달린 채 허공으로 추락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로프가 그의 무게를 받아내며 팽팽해졌다.
그의 뇌는 ‘가라!’고 외쳤지만, 그의 전완근은 ‘여기까지’라며 비명을 질렀다.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피가 통하지 않는 ‘펌핑(Pumped)’ 상태. 그는 지금, 이반 일리히의 법칙을, 자신의 팔뚝으로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그의 팔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탱고, 조용히 해!”
그의 발밑, 저 아래에서 그의 추락에 놀란 탱고가 짖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짜증이, 개에게까지 향하는 것을 느끼며 더욱 비참해졌다.
2. ‘심의(心醫)’의 개입, 혹은 낯선 처방
“헤이, 스탈린 동지.”
그가 바닥으로 하강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맑고도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보였다. 그가 이 ‘지옥의 처마’와 싸우는 동안, 그녀는 유유히 옆에 있는 5.11 난이도의 수직 벽을,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오르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녀는 땀도 거의 흘리지 않은 채, 물병을 건네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뭐? 스탈린?” 김경훈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으르렁거렸다.
“응.” 보보가 반말로, 그의 땀 냄새를 맡기 싫다는 듯 코를 찡긋했다. “스탈린이 지시했던, 그 ‘스타하노프 운동’ 말이야. 탄광 노동자들한테 무한한 압력을 가해서 생산성을 300% 올리라고 쪼아대던 거. 지금 당신 꼴이 딱 그래. 그 멍청한 플라스틱 조각(홀드)한테, ‘내놓으라’고. ‘성공을 내놓으라’고.”
그녀는 그의 굳어버린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이것 봐. 돌덩이네. 당신, 지금 ‘일리히의 법칙’ 위반이야.”
“... 뭐?”
“이반 일리히. 그 양반이 그랬지. ‘인간의 활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하며 나아가서는 역효과를 낸다’고.”
그녀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눈을(그는 그녀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한때 꿈꿨던 ‘심의(心醫)’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김경훈 환자분. 진단명은 ‘급성 효율 중독’입니다. 당신은 지금, ‘더 많이(More Attempts)’ 시도하면, ‘더 좋은(Success)’ 결과가 나올 거라는 낡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어요. 농부가 밭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밀이 자라는 게 아니라, 땅이 썩어버려요. 당신 팔 근육도 마찬가지야. 지금 썩기 직전이라고.”
김경훈은 그녀의 정확한 비유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모드’가, 자신의 ‘차박사’ 기질이, 그를 어떻게 배신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 ‘클라이밍’이라는 유희마저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정복해야 할 시스템’으로 접근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협력’ 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최적화’ 해야 할 기계로 취급했다.
3. ‘공생’의 아키텍처, 혹은 도구의 회복
“일리히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땀을 닦아내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생을 위한 도구(Tools for Conviviality)’를 말했죠.”
“오, 기억은 하네, 이 양반이.” 보보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어요.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가 서로 교환되는 사회. 그런데 나는….” 그는 자신의 딱딱하게 굳은 전완근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몸’이라는 도구를, 내 ‘의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이 도구가 오히려 나를 통제하고 있네요. ‘그만하라’고. ‘더 이상은 무리’라고.”
그는 이반 일리히의 또 다른 경고를 떠올렸다. 기술과 시스템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그것은 인간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는 것.
“나는…”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 나는 이 ‘등반’이라는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더 높이, 더 완벽하게’라는 주인의 채찍질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던 거예요. 내 근육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보보의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서 그의 불안이 가라앉자 비로소 꼬리를 치기 시작하는 탱고의 존재를 느꼈다.
“진짜 ‘공생을 위한 도구’는… 이 오버행 루트가 아니었네요.” 그가 보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당신과, 탱고였어. 내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그만하라’고, ‘역효과’가 난다고 말해주는 존재들. 내 폭주를 막아주는 가장 인간적인 ‘브레이크’.”
보보는 그의 고백에,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며, 그의 지친 뇌를 식혀주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래, 이 바보야. 당신은 기계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시스템 전원 끄고, 집에 가서 찜닭이나 시켜 먹자. 당신이 좋아하는 넓적 당면으로.”
“... 찜닭.” 김경훈이 중얼거렸다. “그거… 아주 ‘효율적인’ 처방인데.”
그는 웃었다. 그것은 더 이상 승부욕에 불타는 전사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꺼이 ‘하산’을 결심한 자의, 유쾌하고도 평화로운 미소였다.
4. 주석: 효율의 아키텍처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그는 보보가 시켜준 찜닭을 먹으며 기분 좋게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전완근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탱고는 식탁 밑에서 김경훈이 몰래 던져준 닭가슴살 조각을 씹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격렬하고도 아픈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효율의 아키텍처, 혹은 일리히의 법칙.
우리는 ‘더 많이’가 ‘더 좋음’을 의미한다는 ‘성장의 아키텍처’에 갇혀 산다.
그러나 이반 일리히는 그 한계를 명시했다.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효율은 역효과가 된다.
나의 ‘연구 모드’(혹은 ‘차박사’ 기질)는 나의 ‘몸’마저도 ‘최적화’ 해야 할 대상으로 착각했다. 나는 ‘클라이밍’이라는 놀이를, ‘정복’ 해야 할 과제로 만들었다.
결과: 수확 체감. 나는 ‘더 많이’ 시도할수록, ‘더 심하게’ 추락했다.
보보는 ‘일리히의 법칙 위반’을 진단했다. 그녀의 ‘개입’은 이 폭주하는 시스템을 멈추는 유일한 브레이크였다.
결론: ‘몸’은 내가 통제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공생’하는 파트너다. 뇌가 ‘가라’고 외칠 때, 팔뚝이 ‘멈춰’라고 말한다면, 나는 팔뚝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이반 일리히가 말한, ‘자율적인 활동’의 본질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붉은색 루트. 홀드 배치가 완전 비논리적이었어. 그건 내 근력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오류’였던 게 틀림없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