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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의 아키텍처

The Architecture of Fidelity

by 김경훈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해한다. 우리는 그것을 무한하고, 분할 불가능하며, 숭고한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그 숭고함을 시험대에 올린다. 그것도 가장 유치하고도 잔인한 질문을 통해서. “누가 더 좋아?”


이 질문은 ‘사랑’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확인하는 행위다. “너는 누구의 편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영토 확인이다. 이 질문의 아키텍처는 ‘사랑’을 ‘선택’의 문제로, ‘관계’를 ‘경쟁’의 구도로 강제로 재편성한다. 질문을 받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시무룩해질 것을 이미 알고 있는 11살짜리 불안한 외교관이 되어버린다.


정답은 정해져 있다. “둘 다 좋아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잃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시스템 중립’ 선언이다. 그러나 이 정답을 내뱉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사랑’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추방된 것이다.


이것은 그 ‘강요된 선택’이라는 이름의 낡은 아키텍처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질문이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돌아왔을 때, 한 남자가 그 시스템의 ‘버그’를 찾아내는 어느 늦가을 밤의 기록이다.



1. 경계 너머의 도시, 혹은 완벽한 균형


김경훈의 대구 아파트 거실은 바깥의 도시 소음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따뜻하고 안락한 섬이었다. 낮은 조도의 오렌지색 스탠드 불빛이 그가 아끼는 낡은 가죽 소파와 책장 가득한 벽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그가 아끼는 싱글 몰트 위스키의 옅은 피트(Peat) 향과, 보보가 켜놓은 샌달우드 향초의 그윽한 냄새가 섞여,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완벽한 ‘일상 모드’에 잠겨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익살스럽고도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연인인 보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태블릿 PC로 18세기 프랑스 철학에 관한 논문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맑고 고른 숨소리가 그의 셔츠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의 오른쪽에는 ‘비번 모드’로 전환된 안내견 탱고가 자신의 거대한 몸을 그의 허벅지에 척 걸친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잠에 빠져 있었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과, 이따금씩 잠꼬대하듯 ‘킁’ 하고 내뱉는 숨소리.


김경훈은 이 완벽한 ‘아키텍처’에 감탄했다.

왼쪽에는 ‘지성’과 ‘사랑’이 오른쪽에는 ‘본능’과 ‘신뢰’가. 그는 이 두 개의 다른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순간이 그가 ‘심의(心醫)’로서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조화’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 완벽한 균형을 깨뜨리는 가장 끔찍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자기야.”

보보가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른하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언제나 장난기를 가장한 채 그의 핵심을 찔렀다.

“진지하게 대답해 봐. 나랑… 탱고 중에, 솔직히 누가 더 좋아?”



2. ‘누가 더 좋니?’, 혹은 기억의 소환


김경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얼어붙었다. 20년 넘게 봉인해 두었던, 그의 가장 낡고 먼지 쌓인 ‘아카이브’가 강제로 호출되었다.


그의 뇌가 현재의 따뜻한 거실이 아닌, 1990년대 후반의,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나던 친척 집 거실로 ‘플래시백’했다.

그는 여섯 살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했던 시절. 사촌 누나와 ‘커트 리’라는 이름의 재미교포 아저씨. 그리고 그의 친어머니. 그들은 어린 그를 가운데 앉혀놓고, 마치 재판이라도 하듯 물었다.


“경훈아, 누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아니면, 누나랑 커트 삼촌이 더 좋아?”


그는 그 ‘야만적인’ 질문의 아키텍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본질’을 답했다.

“엄마가 더 좋아!”

그 순간, 누나의 얼굴이 굳어지고, 커트 리 아저씨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멈췄던, 그 싸늘한 공기의 ‘감촉’.


시간이 흘러, 그는 열한 살이 되었다. 초등학교 체전에서 유도 동메달을 땄던, 꽤 쌀쌀맞은 소년이 되었을 때였다.

“경훈아. 솔직히 말해봐. 아빠가 더 좋아, 아니면 엄마가 더 좋아?”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11살의 나이에, 이미 이 질문이 ‘진실’을 묻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테스트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가장 안전한 답을 내놓았다.

“... 둘 다 좋아요.”

그 ‘중립’이라는 이름의 비겁한 거짓말.


그리고 그가 열일곱 살, 3년간의 병원 공백 끝에, 충주성모학교의 낯선 기숙사에서 세상을 다시 배우던 시절. 그를 찾아온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두 분은 그가 아픈 동안 이혼하셨다)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넌… 결국 누구랑 살고 싶은 거니?”

그는 폭발했다.

“세상에서 제일 지긋지긋한 질문이에요! 제발 좀 그만하세요!”

그는 그 ‘선택’을 강요하는 모든 ‘본질’의 세계를 저주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전부 다 싫어.’


그는 깨달았다. ‘누가 더 좋아?’라는 이 질문은 그가 대학 MT에서 들었던 “안 보이는데, 업을 수가 있나?”라는 말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폭력적인 ‘위조지폐’ 판별기라는 것을. 그것은 그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그를 ‘배신자’ 아니면 ‘편협한 놈’으로 낙인찍는 잔인한 ‘이데올로기’였다.



3. ‘심의(心醫)’의 진단, 혹은 궤변의 반격


“... 자기야?”

그의 긴 침묵에, 보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이 11월의 밤공기보다 더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왜 그래? 아니, 나 그냥… 장난으로 물어본 거야. 그렇게 심각해질 일이야?”


김경훈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뇌가 ‘트라우마 모드’에서 ‘연구 모드’로, 그리고 다시 그가 가장 잘하는 ‘블랙 코미디’ 모드로 재부팅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 지독한 ‘한(恨)’을, 그녀에게 ‘치유’ 받는 대신,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보보를 바라보며, 그만의 익살스럽고도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보보. 당신, 방금… 나한테 엄청난 실수를 한 거 알아?”

“... 뭐?”


“당신은 지금, ‘심신이원론(데카르트)’에 기반한, 아주 낡아빠진 질문을 던졌어.”

“... 뭐? 데카르트?” 보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단순한 감정의 문제를, 또다시 골치 아픈 철학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 김경훈이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는 이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보보(정신/사랑/이성)’와 ‘탱고(육체/본능/신뢰)’라는 두 개의 완벽하게 분리된 ‘실체’를 상정했어. 그리고 나더러,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지. 이건, ‘몸과 마음은 다르다’고 주장했던 데카르트의 오류를, 21세기 거실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거라고.”


“야, 김경훈. 그게 무슨…”


“아니! 들어봐!”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나는 ‘범신론(스피노자)’의 신봉자거든.”

“... 뭐? 스피노자?”

“그래. ‘신은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신(神)은 당신이라는 ‘정신’에만 깃들어 있는 게 아니야. 그 신은 지금 내 다리에 턱을 괴고 자는 이 따뜻하고 멍청한 ‘물질(탱고)’ 안에도 똑같이 깃들어 있어. 나에게 당신과 탱고는 ‘둘’이 아니야. 그건, ‘만물제동(장자)’! 그냥 ‘하나’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할 수가 있어?”


그는 완벽한 궤변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당신은 지금, 르네 지라르가 말한 ‘욕망의 삼각형’을 구축하려 한 거야. ‘나(주체)’와 ‘사랑(대상)’ 사이에, ‘탱고’라는 이름의 ‘경쟁자’를 억지로 끼워 넣었어. 당신, 혹시… 탱고를 질투하는 거야?”



4. 탱고의 ‘합(Synthese)’, 혹은 완벽한 대답


“... 와.”

보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의 뇌가 ‘누가 더 좋아?’라는 단순한 애정 표현을, 어떻게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장자와 지라르를 소환하는 거대한 ‘철학적 아키텍처’로 재구성해내는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젠장, 김경훈.” 그녀가 반말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그놈의 궤변을, 꼭 이렇게 로맨틱하게 포장하더라. 또 내가 졌네, 또.”


“그럼,”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패자는 승자에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건’이 터졌다.

그들의 이 농밀한 ‘앙가주망’에, 잠에서 깬 탱고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이 ‘경쟁자(보보)’와, 그런 그녀를 껴안고 있는 ‘배신자(김경훈)’ 사이를, 38kg의 육중한 몸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크르르릉….’ (기쁨과 불만이 뒤섞인 소리)


탱고는 김경훈의 뺨을 한 번 핥고, 그다음 보보의 턱을 한 번 핥고는 그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에 자신의 거대한 머리를 욱여넣고,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한숨을 ‘푸우-’ 하고 내쉬었다.


김경훈과 보보는 이 거대하고 따뜻한 ‘제3의 존재’의 난입에,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 봤어?” 김경훈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저 녀석, 방금… 완벽한 ‘헤겔의 변증법’을 시전 했어.”

“뭐?”


“‘보보(정)’, 그리고 ‘나(반)’. 이 두 개의 대립하는 존재를, ‘탱고’라는 이름의 더 높은 차원의 ‘합(Synthese)’으로 지양(Aufheben)시켜 버렸잖아. 녀석, 보통이 아닌데. 저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심의(心醫)’야.”



5. 주석: 신의(信義)의 아키텍처


그날 밤, 보보와 탱고가 그의 양옆에서 잠든 것을 확인한 후(그는 양쪽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로 그것을 알았다), 김경훈은 조용히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복잡하고도 따뜻했던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신의(信義)의 아키텍처, 혹은 ‘누가 더 좋아?’라는 질문에 답하는 법.

‘누가 더 좋아?’라는 질문은 ‘경계선(윌리엄슨)’을 긋게 만드는 폭력이다. 그것은 ‘사랑’과 ‘우정’ 사이의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나는 11살 때, ‘둘 다 좋다’는 ‘중용(아리스토텔레스)’을 택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닌 ‘전략’이었다.

오늘, 보보는 나에게 그 낡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나는 스피노자와 장자의 ‘만물제동’으로 반격했다.

결론: 하지만 진짜 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었다. 탱고는 ‘둘 다’라는 얄팍한 타협이 아니라, ‘둘 사이’를 파고드는 ‘접촉(콩디야크)’을 통해, 이 이원론적 대립을 완벽하게 ‘종식’시켰다.

그렇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기꺼이 그 틈새로 파고들어, ‘하나’가 되려는 뻔뻔하고도 따뜻한 ‘본능’이다.

… 탱고는 확실히 나보다 더 훌륭한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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