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Void
인간은 본능적으로 빈 곳을 채우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고 했다. 이를 '호로르 바쿠이(진공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
나의 위장(Stomach)도 그랬다. 지난 35년간 내 위장은 1%의 빈 공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공복감이 느껴지면 즉시 탄수화물로 그 틈을 메워야 했다. 그것은 공포로부터의 도피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데모크리토스의 후예가 되었다.
내 복부에 꽂힌 마운자로 주사는 내 몸 안에 거대한 '진공'을 만들었다.
비어있으나 가득 찬 상태.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니다. 철학적 수행이다.
[장모님의 반찬과 토리첼리의 실험]
오전 11시. 보보의 1.6 가솔린 터보 SUV 조수석.
차 안은 평온하다. 하지만 뒷좌석에서는 위험한 냄새가 나고 있다.
보보가 본가(처가)에서 가져온 반찬통이다. 장모님표 꼬막무침과 더덕구이.
"자기야, 엄마가 이번 꼬막 진짜 좋다고 꼭 자기 먹이래. 이따 점심때 햇반 돌려서 같이 먹자."
보보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렸을 것이다. 장모님의 손맛은 미슐랭 가이드도 울고 갈 수준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 위장은 1643년 토리첼리가 만든 수은 기둥과 같다.
대기압(장모님의 손맛)이 아무리 짓눌러도, 내 위장 상단에는 완벽한 '진공'이 존재한다.
"보보, 미안한데... 나 지금 위장이 토리첼리의 진공 상태야. 꼬막이 들어갈 틈이 없어."
"뭐? 엄마 음식을 거부해? 너 진짜 약 맞더니 간이 부었구나?"
보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니, 거부가 아니라... 보존하는 거지. 내 미각이 돌아올 때까지 냉장고라는 타임캡슐에 넣어두자는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장모님의 음식은 소중하다. 식욕도 없는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는 건 모독이다.
[ 마그데부르크의 웍(Wok)]
점심시간. 우리는 결국 외식을 택했다.
보보가 집에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다고 인정한 종목, '중식'이다.
대구 화교가 운영하는 정통 중화요리 전문점.
식당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불향(Wok Hei)'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기름에 튀겨지는 탕수육 소리. *치이익-*
달그락거리는 웍 소리. *챙, 챙.*
보보는 간짜장과 탕수육 소(小)자를 시켰다.
"자기 진짜 안 먹어? 여기 탕수육은 고기튀김 수준인데."
나는 '오토 폰 게리케'의 실험을 떠올렸다.
그는 진공의 힘으로 16마리의 말이 끄는 반구를 붙여놓았다.
지금 내 입술이 그렇다. 저 강력한 춘장 냄새와 돼지기름 냄새가 나를 유혹하지만, 마운자로가 만든 진공 펌프가 내 입을 꽉 닫아버렸다.
*(Blind Hacking Initiated)*
* Input: 바삭한 탕수육 씹는 소리. *와삭.* 찐득한 소스가 묻어나는 소리.
* Analysis: 보보는 지금 행복하다. 미식가인 그녀가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내고 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했어. 그릇은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고. 나도 속을 비워야 오늘 논문이 써질 것 같아. 자기는 많이 먹어. 난 냄새만 맡아도 배불러."
나는 힙스터처럼 쟈스민 차만 홀짝였다.
보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하다 독해. 이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철학 타령이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 카시미르 힘 (The Casimir Force)]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이동했다.
보보는 만족스러운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아메리카노, 보보는 라떼.
"자기야."
"어."
"너 살 빠지고 나서 좀... 재미없어진 거 알아? 예전엔 같이 '음~ 맛있다!' 하면서 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푸드파이터 된 기분이야."
그녀의 서운함이 훅 들어왔다. 미식가에게 식사 파트너의 부재는 큰 상실일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진공이 완전한 '무(Nothing)'가 아니라고 한다. 진공 속 두 금속판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미세한 힘, '카시미르 힘'이 존재한다.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보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진공 상태였지?"
"알면 됐어."
"하지만 물리학자 카시미르가 말했어. 진공 속에서도 끌어당기는 힘은 존재한다고. 내가 탕수육은 안 먹어도, 자기를 향한 인력(Attraction)은 그대로야. 아니, 내 몸에 군더더기(지방)가 사라져서 인력이 더 강해졌을걸?"
"말이나 못 하면."
보보가 피식 웃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엄마표 꼬막도 마다하고, 중식당 냄새도 참아?"
"우주의 70%가 암흑 에너지라잖아. 내 배 속도 지금 암흑 에너지로 가득 차서 그래. 하루 종일 안 먹어도 우주가 팽창하는 것처럼 배가 불러."
"그래, 그래. 우주적인 궤변 잘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녁엔 엄마가 싸준 더덕구이 한 조각이라도 먹어. 정성인데."
[에필로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애플워치 울트라 3를 확인했다.
"활동 대사량 3,200kcal."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공을 유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 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에너지를 태우고 있었다.
'무(無)'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상태라는 말이 맞나 보다.
내 지갑도 텅 비었고(Vacuum), 내 위장도 비었다.
하지만 턱시도 핏은 완벽해지고 있다. 그리고 냉장고엔 장모님의 반찬이 숙성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무의 효용' 아닐까.
"탱고야, 너도 오늘 간식 금지다. 우리 집은 이제 진공 구역(Vacuum Zone)이야."
탱고가 어이없다는 듯 하품을 했다.
[주석: 음성 메모]
진공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채워지지 않음으로써 얻는 자유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 이 3대 욕구로부터 해방되니 내가 좀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된 기분이다. (물론 약 기운 때문이지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까 보보가 먹던 탕수육 냄새는 좀 치명적이었다.
약 끝나면 제일 먼저 그 중국집 가서 곱빼기 시켜 먹어야지. 이건 '플랜 A'다. 수정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