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범어동 '가스트로파체'

by 김경훈

수성구청역 인근, 학원가의 분주한 소음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접어든다. 내 오른쪽 팔짱을 낀 연인 보보의 온기와, 왼쪽 손에 쥐어진 탱고의 하네스에서 전해지는 리듬감이 나를 안정시킨다. 우리는 오늘 밤, 대구라는 도시를 잠시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가스트로파체'. 이탈리아어로 '평화(PACE)'를 뜻하는 이곳은 이름처럼 도심 속 은신처 같은 곳이다.


가게 앞에 다다르자 보보가 나직하게 속삭인다.

"여기 간판이 참 무심한 듯 예뻐. 회색 벽에 그냥 'PACE'라고만 적혀 있어."

그녀의 묘사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모던하고 차분한 회색 캔버스가 그려진다.



[대체 텍스트 : 시각 없는 사진 1 - 공간의 질감]

소리: 묵직한 통유리 문을 열자 들려오는 와인 잔 부딪치는 '챙-' 소리. 오픈 키친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칼질 소리와 셰프의 낮은 목소리가 만드는 기분 좋은 웅성거림.

냄새: 코끝을 스치는 쿰쿰하고도 고소한 숙성 치즈의 향기. 그 뒤를 이어 따뜻하게 데워진 트러플 오일의 묵직한 향이 보보와 나 사이의 공기를 메운다.

온도: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와 달리, 노란빛 샹들리에가 켜진 듯 온기가 감도는 쾌적한 실내 온도.



자리에 앉자 셰프님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이곳은 메뉴판을 정독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셰프는 마치 오페라의 해설자처럼 테이블로 다가와 오늘의 요리를 설명해 준다.

"오늘 모짜렐라는 아침에 짠 우유로 직접 만들었습니다. 아주 신선할 거예요."

나에게, 그리고 메뉴 고르기를 신중해하는 보보에게 셰프의 목소리는 가장 친절한 가이드다. 우리는 셰프의 추천대로 '파체 플레이트'와 '카초에페페' 파스타, 그리고 레드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잠시 후, 둔탁한 나무 도마가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가 들린다. '파체 플레이트'다.

"와, 이거 봐. 햄이랑 치즈가 꽃처럼 폈어."

보보의 탄성에 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재료들을 만져본다. 얇게 저민 프로슈토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갓 만든 모짜렐라 치즈는 아기 엉덩이처럼 포동포동하다.


"짠 할까?"

보보의 제안에 와인 잔을 부딪친다. 맑은 파열음과 함께 와인 향이 코끝을 감싼다. 프로슈토를 한 입 베어 물고 와인을 넘기니, 짭조름한 감칠맛과 타닌의 떫은맛이 입안에서 완벽한 왈츠를 춘다. 탱고는 테이블 아래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엎드려 있다. 셋이 함께하는 이 순간이 완벽하다.



[대체 텍스트 : 시각 없는 사진 2 - 미식의 클라이맥스]

촉각: '카초에페페' 파스타 면을 포크로 감을 때 느껴지는 꾸덕꾸덕한 저항감. 소스 없이 오로지 치즈와 후추만으로 버무려진 면의 묵직한 질감.

미각: 보보가 "이건 정말 진하다"며 감탄한, 페코리노 치즈의 농축된 풍미. 혀끝을 톡 쏘는 통후추의 알싸함이 느끼함을 단칼에 베어내는 순간의 짜릿함.

청각: "맛있다"며 서로 마주 보고 웃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 행복한 소음을 배경으로 깔리는 재즈 선율.



이탈리아 정통 방식인 '카초에페페'는 그야말로 '덜어냄의 미학'이다. 화려한 소스 없이 치즈와 후추만으로 승부한다. 나는 보보에게 묻는다.

"어때? 이탈리아에 온 것 같아?"

"응, 눈 감고 먹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아."

보보도 잠시 눈을 감고 미각에 집중한다. 우리는 같은 맛을 느끼며,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감각적 대화를 나눈다.


셰프가 다시 다가와 묻는다.

"입맛에는 좀 맞으신가요? 간이 세지는 않나요?"

그의 질문은 형식적인 확인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예우 같다. 보보가 웃으며 답한다.

"너무 맛있어서 와인이 금방 동나겠어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입안에는 여전히 기분 좋은 치즈의 여운이 왼손에는 보보의 온기가 오른손에는 탱고의 든든함이 남아 있다.


'가스트로파체'. 이곳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식당이 아니다. 셰프의 목소리로 메뉴를 듣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탈리아의 지도를 그리는 곳. 시각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잠시 눈을 감고 서로의 목소리와 맛에 집중하고 싶다면 우리 셋은 주저 없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메뉴: 파체플레이트(6만5천원), 파스타(2만1천원~3만5천원), 스테이크(350g 6만8천원), 티라미수(1만5천원), 샐러드(1만3천원~2만1천원)


영업시간: 17:00~00:30 | 금, 토요일 17:00~01:00(익일) | 공휴일 12:00~01:00(익일) - 일, 월요일 휴무


전화: 010-5874-2661


주소: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501길 7(범어동)


예산: 2~4만원대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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