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Aug 16. 2024

아름다운 생명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다 보면 저절로 눈에 익게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생면부지의,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 가운데에도 말이다. 비슷한 생업적 패턴 때문이려니. 억지로 장기기억 메커니즘에 저장하는 이들까지 몇 있다. 기억해 두었다가 전철 탑승에 영민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아주머니는 금방 내리는 사람이니까 앞에 딱 서야지, 저 청년은 나보다 더 오래 타고 가더라, 딴 데 서있는 게 낫겠어.’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공지한다. 나는 빈틈없는 이성애자다. 최근 그간의 사유와 일절 관계없는 기억적(記憶的) 타인이 생겼다. 어느 아침, 전철역에 내려 회사로 향하는데 몇 발자국 앞서 걷는 남성이 시선을 끌었다. 흘끗 보고 지나쳤던 시선을 다시 록온(Lock-on : 군사 용어, 전투기의 적기 조준 기능)할 수밖에 없었다.


  이십 대 중후반쯤 됐을까. 큰 키에 비율이 좋았다. 남자답게 벌어진 어깨 위에 올린 머리통이 유독 조막만 하다. 흑단 같은 머릿결이 단정하게 정수리 뒤쪽으로 흐른다. 긴 팔다리 덕에 더 힘차게 걷는 듯 보인다. 감색 양복을 말쑥하게 입었다. 소매와 바짓단 길이가 알맞아서 세련되고 깔끔하다. 새하얀 목 뒷덜미와 팔목, 손등은 옷의 색감과 또렷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얼마 뒤엔 지하철 객실 안에서 보았다. 운 좋게 앉아서 가는 출근길, 맞은편에 그때 그 인상적인 뒷모습이 서있었다. 그날은 검은색 슈트를 입었던 것 같다. 여전히 실루엣만큼은 여느 연예인 못잖은 기록적 컨디션이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이목구비도 과연 그럴 것인지 궁금했다. 몇 사람의 유격을 두고 자연스럽게 각도를 틀어 정면을 확인하려는 찰나! 출입문이 열리며 군중과 함께 그 뒷모습도 쓸려나갔다.


  그러다 어제 아침, 아름다운 후면과 다시 조우했다. 잰걸음으로 지나쳐 그를 앞섰다. 다른 데를 보는 양 고개를 돌려 마침내 전면을 확인했다. 일단 남자 얼굴이 저렇게 하얄 수 있나 싶었다. 얼굴이 소멸하듯 작았다. 그런 중에 거기 배치된 여러 감각 기관은 조화롭고 입체적이어서 서구적 인상을 풍겼다. 잘 생겼네, 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굴렀다. 잘 생긴 남자이기 전에 하나의 ‘아름다운 생명체’라는 사유가 점등됐다.


  조물주의 걸작께서 대기업과 공공기관 등 내로라하는 직장이 많은 큰 건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거기 어디의 신입사원쯤일 것으로 짐작했다. 신은 다 주지 않는다더니 손수 정성스럽게 빚은 피조물에겐 예외인 것일까. 그러면서 문무와 재색을 두루 갖춘 그의 삶을 하릴없이 공상해 보았다. 그 여정은 어땠을까.


  신의 작품에 대한 나의 감상은 경이로움에서 금세 부러움으로 바뀐다. 나와 엇비슷한 삶의 관문을 통과할 때에도 그 크고 아름다운 생명체는 나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 : 고객이 제품과 서비스를 처음 만나는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 경영학 용어), 수많은 타인들은 기꺼이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을 품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직접 대면하기에 앞서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올라온 그의 프로필 사진만 보고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부탁하는, 아니면 거절하는, 어쩌면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때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아무튼 타인을 나의 편으로 불러오면 좋을,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뜻을 관철해야 하는 그 모든 찰나에 그 상서로운 힘은 작동했을 것이다. 때마다 문제없이.


  가여운 나의 삶으로 돌아온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영문 모를 호의 같은 건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부탁과 거절, 설득과 설명이 필요한 모든 경우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악의를 품지 않았고, 적절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음을 반드시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절로 열정적 자세를 견지하게 되는 밀도 있는 삶일 수밖에 없었노라 자평한다.


  공상은 이제 시공을 초월한다. 비교적 착하게 살아 먼 훗날 절대자의 나라에 입성하게 되면 내 한 번 분연히 일어나리라. 그리고 물으리라.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처럼. 절대자께서 몇 마디 말씀하시는 중에 됐다고, 이해한다고, 딱 끊고 쿨 하게 돌아서겠다. 그러다 혹 그 동네에서 아름다운 피조물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너도 착하게 살았구나, 넌 착하게 살기 쉬웠을 거야, 난 만만하지 않았어, 하며 스치고 지나 점이 될 것이다. 그때는 다시 돌아서 보지 않을 셈이다. [Hoon]

매거진의 이전글 기술과 기술의 만남, PTZ 카메라와 XR 콘텐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