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가장 나른한 오후 시간, 업무 회의 중에 모친이 걸어온 전화가 울린다. 얼른 거부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제조사가 전화기에 미리 입력해 놓은 ‘회의 중입니다’ 메시지를 잇달아 보낸다. 전화기 개발자가 사용자의 바로 이 순간을 대비했던 것이로구나. 대단한 양반. 월급도 많이 받겠지. ㅋ
회의실을 벗어나며 최근 통화 목록 맨 윗줄을 누른다. 어머니가 받으신다. 어머니는 맞벌이하는 나와 처를 대신해 낮에 초등학생 딸아이를 돌봐주신다. 무한한 희생과 헌신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돌아와서. 딸아이가 오늘 치렀던 학급 회장 선거에서 떨어졌단다. 방금 집에 잠깐 들렀다 보습 학원으로 보냈는데 어머니 마음이 많이 아리시단다. 혹 울더냐고 여쭸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신다.
됐으면 오늘 저녁 조촐한 잔치일 텐데, 내 마음도 아쉽다. 어제 딸아이 낌새를 돌이켜보니 기대가 컸던 눈치다. 막 퇴근한 엄마 아빠 곁으로 와서 묻지도 않은 말로 고리를 엮는다. 친구 아무개는 꼭 찍어줄 것이고, 아무개는 안 친하지만 왠지 한 표 줄 것 같고, 후보로 나올 다른 친구 아무개는 자기보다 인기가 없고, 나밖에 없네! 마음은 벌써 당선인 신분이다. 선거 공약은 뭐라고 말할 것이냐 물었다. 코로나 시대 자칫 멀어질 수 있는 친구 사이를 가깝게 당길 수 있는 회장이 되겠노라 중얼거린다. 딴에는 몇 번이고 문장을 다듬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은 더 크게 돌아오는 법. 오늘 학원 수업은 딸아이 머리와 가슴에 단 한 줄도 남지 않으리라. 비싼 학원비에 공친 수업이래도 아빠는 아깝지 않다. 오늘 우리 딸이 그런 것보다 몇 곱절 귀하고 비싼 것을 배웠을 테니까.
아빠는 그렇다. 아빠는 우리 딸이 성공의 비법을 쉽게 깨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여물고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바란다. 우리 딸이 어려서 아직 모르겠지만 실은 삶의 진짜 얼굴은 그렇거든. 안 되는 것, 이룰 수 없는 일을 훨씬 더 많이 보여주거든. 아흔아홉 번 꺾이다가 겨우 한 번 솟을 때 그때 잠깐 달콤한 것이 인생이거든.
우리 딸이 오늘 그런 것도 배웠겠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타인을 설득하여 내 뜻에 따르게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 같은 피붙이 가족이나 너 좋다면 다 해주지. 우리 식구 말고 다른 집 사람들, 심지어 또래 친구라도 하얀 종이에 네 이름 세 글자 적어 내게 하는 것, 그런 것도 어젯밤 네 들뜬 마음대로 쉬 되지 않음을 눈물에 녹여 받아들였을 거다.
오늘 저녁엔 우리 딸 좋아하는 초밥 한 상자 포장해서 집에 가야겠다. 동네 전철역 앞 가게 맘씨 좋은 주인장 아저씨가 쥐어 만드는 맛있는 초밥. 고추냉이 뺀 연어초밥 열 피스에 문어, 새우, 소고기 초밥 한 피스씩. 어때, 아빠 네 취향 잘 알지? 이거 먹고 기운 내.
쿠키) 귀갓길에 딸아이와 통화한 내용을 토대로 선거 결과를 공개합니다. 한 반 스무 명 남짓 유권자에 회장 선거 당선자 8표, 우리 딸 7표. 이어진 부회장 선거 당선자 12표, 우리 딸 10표! 전 또 겨우 한두 표밖에 못 얻어서 그게 큰 상처가 될 줄 걱정했는데 아니었네요. 정말 아깝게 떨어졌습니다. 딸! 1학기 때 친구들한테 솔선수범하고 봉사해서 한 명씩 마음 얻으면 2학기 때는 또 혹시 모르겠다! 파이팅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