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우울한 날이 계속됐다. 스마트폰에 ‘우울증 자가 진단’이라고 입력했다. 손가락 끝을 위로 튕길 것도 없이 바로 적확한 결과가 나온다. ‘CES-D 척도’라는 것이 있단다. 우울증 선별검사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자가 진단 검사다. 문항별 점수를 모두 더해서 16점 이상이면 경증, 21점 이상이면 중간, 25점 이상이면 중증일 가능성이 높다. 머릿속으로 셈해볼까 하다 마침 컴퓨터 앞이므로 굳이 스프레드시트 소프트웨어를 켠다.
이거는 2점, 이거는 1점, 그래, 이건 3점이지. 수식 버튼을 누르고 지정한 영역의 숫자를 더하라는 명령을 입력한다. 심드렁하니 결괏값이 나온다. 33점. 머릿속에서 대강 점수가 쌓일 때부터 벌써 십몇 점은 되겠는데 싶었다. 이렇게 높다고? 문항을 꼼꼼히 읽고 아니다 싶은 답은 고치기로 한다. 아까의 컴퓨터 명령을 반복한다. 32점. 겨우 1점 줄었다. 이십몇 점쯤이나 될까 싶었는데. 안내된 내용대로 라면 중증이다. 이거 당장 수화기를 들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예약을 잡아야 하나.
내친김에 지표 하나를 더 따져본다. ‘우울증 진단 기준’이라는 것도 있다. 9가지 중 5개 이상의 증상이 2주 이상 계속될 때 우울증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건 맞지, 이것도 내 경우네, 이건 좀 헷갈리는데, 아닌 걸로 하자. 이 정도는 컴퓨터 없이 셈할 수 있다. 열 손가락을 폈다가 하나씩 접어보니 여섯 개. 우울증이 맞긴 맞는 건가.
정신의학과 병원을 찾는 스스로를 시뮬레이션해본다. 우선 근처 정신의학과를 검색해보겠지. 한참 머뭇거리다 전화를 걸겠지. 단정한 인상의 간호사가 받겠지. 진료 예약이 가능하냐 묻겠지. 약속한 시간에 병원을 찾겠지. 저희 병원 처음이시냐 묻겠지. 그렇노라 대답하고 간단한 인적사항을 쓰겠지. 진료실에 입장하시라 하겠지. 쭈뼛쭈뼛 인사하며 의자에 앉겠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느냐 묻겠지. 마음의 병이 있는 것 같다 답하겠지. 허락된 시간 동안 내 증상을 풀어놓겠지. 당신의 경우는 이렇다 처방을 내려주겠지. 다음 진료일을 잡고 병원을 나서겠지. 횡단보도를 건너며 내가 진짜 우울증 환자구나 싶겠지.
그런 생각은 해봤다. 대단한 병리학적 치료가 아니라도 좋다. 최소한 주어진 시간 동안 내 어두운 이야기에 성심성의껏 귀를 열어줄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일지 말이다. 진료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크게 아깝지 않겠다.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병원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여기까지 사고가 흐를 때쯤 컴퓨터 모니터 귀퉁이에 노란색 상자가 점멸한다.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열어본다. “형, 오늘 점심 약속 없으시면 같이 어때요?” 짧은 물음에 우울의 파도가 쏴아 물러간다. 오늘 오전 우울에 관한 탐색은 우선 여기까지 하자. 그러고 보니, 우울증 진단 문항에서 식욕에 관한 건 전혀 이상이 없다고 답했네. 그래 먹고 싶다는 건 그래도 살아보겠단 얘기겠지. 점심 식사를 청한 후배에게 곧장 답신을 보낸다. “회사 로비는 싫고 문 밖 그늘 밑에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