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의 한 가지 저주는 통증이 없는 사람에게 거짓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환자는 멜로드라마 같은, 비현실적이고 상투적인 은유로 통증을 표현하려 안간힘을 쓴다. 당뇨 신경병에 걸린 노숙인은 작은 신경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어 허벅지와 발이 덴 듯한 통증을 이렇게 묘사했다. "얼음송곳처럼 따갑고 찌르는 것처럼 아파요…" (163쪽)
흔히 쓰는 말 중에 내가 싫어하는 게 “저 애, 저거, 저거 꾀병이야.” 하는 말이 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신의 아이에게 누가 그런 말을 할까 싶겠지만 나는 많이도 보았다. 주변의 엄마들도, 가까운 사이의 어떤 분도 아이들이 어릴 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저거, 저거 꾀병이야. 하긴 육아서의 바이블 『삐뽀삐뽀 119 소아과』에서도 ‘아픈 아이에게 혜택을 주지 말라’고 쓰여 있기는 했지만, 난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주는 편이었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게 아니어도, 어디가 다친 건지 당최 모를 때조차도, 아프다는 그 말을 믿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는, 호~ 한 번 불어주고 후시딘 발라주고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고는 했다. 그건 내가 통증이란 타인이 공유할 수 없다는 진실을 알아서라기보다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나도 많이 아팠으니까.
다른 통증은 차치하고 우주의 섭리에 의한 생리통만 해도 내 우주는 너무 버거웠다. 어느 정도 생리통이 심했냐 하면 출산의 고통에 비견될 만큼 심했다. 5분 진통이 와서 분만실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출산의 괴로움이 생리통의 강도와 비슷해 도와주던 간호사님이 ‘이제, 들어가실게요!’라고 소리칠 때 ‘그래? 이게 정말 다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작고 딱딱한 책상, 생리통 때문에 엎드려 있는 친구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내가 아는 고통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 겪은 사람만 아는 통증이었다.
이 책은 통증의 역사를 다루고 각종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을 추적한다. 통증을 이겨내려는 인류의 지난하고 고단한 과정을 보여주고,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의학의 위업 속에서도 여전히 나’만’ 아는 통증의 괴로움에 관해 기술한다. 통증의 근본 원인을 추적하려는 의학적 노력에 더해 마취제를 비롯해 통증을 감소시킬 약제와 약품에 대해 논한다. 무엇보다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전국 혹은 전 세계 병원을 투어하는 환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의사, 어느 환자에게나 똑같이 처방하고 다음 주에 만나자는 의사, 환자에게 필요한 바로 ‘그’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는 의사. 통증에서 벗어난 사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또 하루를, 그다음 하루를 통증과 씨름한다.
커트가 말했다. "길을 벗어나면 제자리로 돌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군.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내가 대답했다. "내 인생이 그랬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듣고 싶어 한 말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커트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약해진 몸으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커트는 모든 여자가 좋아할 만한 남자다. 얼굴과 마음씨가 훌륭하고 지적이고 재치 있는데다 하늘빛 눈망울의 소유자이니까. 남부러울 것 없는 커트를 생각하면 혼란스러웠다. 사귀는 내내 그랬다. 커트를 보기만 하면 언제나 가슴속에 불이 타올랐다. 하지만 커트와 사귀면서 나는 건강과 체력과 역량과 솔직함을 잃었다. (104쪽)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아, ‘통증 일기’를 백미라고 말하는 나의 이 잔인함에 용서를 구한다)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당연히 저자의 통증 연대기, 통증 일기다. 오랫동안, 인류는 고통과 통증이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징벌이라고 여겼다. 저자 역시 그랬다. 탐내서는 안 되는 남자를 탐내서. 너무 근사한 남자를 꼬시려고 해서. 완벽한 그와 첫날밤을 보낸 후부터 그녀는 경추증, 척추관 협착증, 후두 신경통, 충돌 증후군, 회전근개 증후군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통당한다. 자신의 통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통증에서 자유롭기 위한 여정들은 한 편의 소설과 같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아마도 그녀의 기록이 진실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슬픔과는 또 다른 결의 여러 감정이 그녀의 통증 일기에는 살아있다. 솔직한 것이 무엇에든 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가 자신의 통증에 솔직하게 맞서는 장면들은 그녀의 숭고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서 더욱 그녀에게 감동하게 된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녀의 통증과 고통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운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운을 자기가 타고난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당연히 나이듯 행운이 당연히 내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행운이 행운인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고 그늘에 내던져질 수 있는 것이다. 동전이 뒤집히듯 내 삶도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역사적으로 좋은 시기(대다수 시기와 비교할 때), 좋은 나라(질적으로, 양적으로), 좋은 혈통, 좋은 몸, 좋은 심장, 좋은 신장, 좋은 폐, 그리고 또 …… 동전이 뒤집히는 건 반갑지 않았다. (305쪽)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운이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 돈과 시간, 열정과 체력 혹은 긍정적인 성격에 타고난 유머 감각.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이 모든 건 동시에 혹은 차례로 어느 때고 그늘에 내던져질 수 있고, 눈앞에서 이내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고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나대지 말고, 까불지 말아야 한다. 오만방자하지 않았던 그녀마저 이렇듯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행운이 나와 함께함을 기뻐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 그녀가 통증에서 자유로워졌기를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