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독서, 라는 제목에서는 한국의 흔한 ‘엄마’와 흔한 ‘독서’를 상상하게 된다. 독서가 참 좋대. 독서 많이 한 애들이 공부도 잘 한대.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혀야 돼. 책도 많이 사야 하고. 그래서 이번에 새로 전집 두 질이나 들였잖아.
아이들을 위해 책을 찾아보고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책을 구입하는 엄마들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각 연령에 적합한 독서지도법이 있고, 여러 번 읽을만한 좋은 책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권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엄마 독서’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기 위한 ‘선별 작업’에 불과하다. 당연히 필독서 위주일 수밖에 없고, 책을 권하는 기간도 매우 한정적이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초등 고학년 때부터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학원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0세부터 10세까지가 책을 제일 많이 읽는 연령대다. 본격적으로 어려운 책들을 읽기 시작하고, 한국말의 유려함을 음미하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책 읽기가 가능해지는 연령의 아이들은 모두 문제집과 뜨거운 한 판(?)을 벌여야 하기에 책 읽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의 ‘엄마 독서’를 기대했던 엄마라면, 이 책은 적잖이 실망스럽다. 이 책은 ‘엄마의 독서’에 대한 책이다. ‘엄마’라고 호명된 사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읽어나가는 독서 여정에 관한 책이다. 책의 시작점 자체가 ‘페미니즘 모먼트’이다. 결혼 이후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새로운 신분에 편입된 이후 그녀가 겪었던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억울함이 독서 여정의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준다.
하루아침에 남편과 사회 전체가 한통속이 되어 적군으로 변한 듯한 그 상황에서 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 상황은 끝날 길 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고, 남편과 나의 차이는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었다. 그는 대리에서 과장으로, 차장으로, 부장으로 승진하고 연봉도 차곡차곡 오르며 가방끈도 길어질 것이나, 나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영영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식탁 밑을 기어 다니며 밥풀을 떼어내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댈 것이었다. (49쪽)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자는 주저 없이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느낌, 강 건너로 화려하고 북적이는 세상이 보이는데 나만 홀로 외딴섬에 고립돼 끝없이 고행을 반복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반대였다. 다시 일을 하게 된다 해도,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나 스스로를 ‘전업주부’라는 카테고리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 뻔하고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에 목매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다음 주에 만날까?’하고 전화할 친구들이 있었고, 아이들을 다 데리고 외출하기 어려울 때는 ‘네가 우리 집으로 올래?’라고 말할 수 있는 후배가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이 가까이 사셨고, 언제든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학교 모임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가능하면 ‘** 엄마’로 호출되는 모든 자리를 피했다. ‘** 엄마’를 빼고서는 나를 설명할 다른 말이 없었는데도, 나를 규정할 다른 단어가 전무한데도, 나는 ‘** 엄마’로서의 나를 거부했다.
엄마들과 많이 어울리지 않았기에 사교육 정보에는 완전히 무지했다. 큰아이 4학년 때, 임원 아이들 엄마 모임에서 아이들 영어 학원 이야기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학원 이름과 아이가 다니는 레벨을 이야기하게 됐다. 아이가 어느 대학에 갔는지를 자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간 것이 엄마의 성과이기에 자랑해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지배하는 이상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영어 학원 레벨을 듣고 대단하다며 부러워하는 분위기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어리둥절했다.
소신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한국에서 교육은 가장 중차대하고 엄중한 투자 대상이다. 남편과 나는 사교육에 관한, 아이들 공부에 대한, 사교육비 지출에 대한 생각이 일치한다. 나는 ‘엄마표’ 정보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있었다.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후 학습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저자는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를 읽게 된 후, 큰 틀에서 인간의 특성을 보고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되면서 한결 자유로워진다. 자잘한 현상 하나하나에 일일이 흔들리지 않는 힘을 얻게 된다.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에서는 양육에서 아이들이 가진 무한한 파워에 의문을 제기하고, ‘민주적인 엄마’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순간에도 망설이고 뭉그적거렸던 자신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됐던 저자는 일관되고 단호한 어조의 엄마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엄마보다 아이들에게 덜 혼란스러울 것임을 알게 된다.
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항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안전과 공동체에 대한 예의. 이 두 가지가 ‘필수 규칙’의 주를 이루었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문제들에 한해서는 일관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되, 나머지 문제들에서는 최대한 허용해주자는 것이 내가 정한 방침이었다. (168쪽)
그에 더하여 숱하게 많은 육아서를 읽어왔던 경험치로 기존의 육아서들의 한계를 발견한다. 나는 이 지적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통과해가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읽었던 육아서들이 실은 엄마들용으로 마련된 ‘자기 계발서’였다는 것을. 육아와 가사를 온통 엄마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사회구조를 직시하기보다는 시선을 엄마인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드는 자기 계발서. 아이의 육신과 정신 모두 너에게 달려 있으니 시종일관 자신을 채찍질하여 어떠한 순간에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아이들의 엄마로 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자기 계발서. (166쪽)
나도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나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육아서, 가끔 읽어줘야 한다고. 아이들 크는 거 금방이라고. 금방 커서 훌쩍 내 곁을 떠나갈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더 예뻐해 주고 사랑해 줘야 한다고. 30년 가까이 살아왔던 자신을 잊고 자신을 뒤로하고, 이제 엄마로 살라고. 엄마로서만 살라고 말하는 그런 책들의 주장을 나 역시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엄마가 되었기에, 엄마로서 살아야 하기에, 그런 책을 읽었고, 자꾸 되뇌었다 잘 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자기 최면 아닌 자기 최면에 빠져들었다.
현재 진행형, 엄마의 자리를 묻는 엄마의 독서. 정아은 작가가 찾은 답이다.
정말 좋은 엄마가 되려면 ‘좋은 엄마’가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세상에 ‘좋은 엄마’는 없다. 30여 년 동안 엄마가 아닌 상태로 살아오고, 그에 따라 자기 고유의 성향과 습속과 역사가 형성돼 있고, 행복과 성과와 명예를 추구하고 싶은 한 인간이 자신의 여러 역할 중 하나로 ‘엄마’를 받아들인 상태가 있을 뿐이다. 엄마가 아이와 맺는 관계는 엄마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일부분이다. 다른 관계보다 더 가깝고 영향력이 클 뿐이다. 엄마가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연계를 끊어버리고 오직 엄마로만 기능하려고 하면, 아이와 우주의 관계도 끊어진다. …
그러므로 좋은 엄마가 되려면, 그냥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 내가 좋은 인생을 살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고,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면 된다. ‘엄마’가 나의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일 뿐, 나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263쪽)
아주 시원시원하게 읽히는 책이다. ‘책’이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질투, 행복을 함께 엮어낸 작가의 용기와 끈기에 나 역시 위로받았다.
좋은 엄마. 난 한 번도 좋은 엄마이길 원한 적이 없었다.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영양 만점 집밥 대신 오뚜기 컵밥을 줘도 다정한 엄마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만났을 때, 우리가 만났을 때,
다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