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샤피로의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을 읽고
4년 전, 소설가 A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한 해에 한 번 대형 출판사에서 주는 큰 상을 받은 작가로, A가 쓴 장편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대형 서점에서 높은 판매 순위를 기록한 책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4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소설은 언제나 눈에 띄는 곳에 있다.) 10대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면서도 어린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을 건드는 매력이 있었다. A의 책을 단숨에 읽어버린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출판사에 연락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당시 나는 입사한 지 만 2년이 되지 않은 신입 기자였다. 문화부에서 기사를 쓴지는 6개월도 안 되어 일과 삶의 경험이 미천했다. 하지만 나는 작가, 배우, 감독 등 온갖 문화 예술계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에 흠뻑 빠져있었다. 만나는 사람은 달랐지만 던지는 질문은 비슷했다. “당신의 어떤 경험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 작품을 쓰게 했습니까?” 예술가들이 보여준 퍼포먼스 자체의 상상력과 탁월함, 정교함을 파헤치려하기 보다는 ‘예술가의 자전적 경험이 이런 저런 창작의 과정을 거쳐 이토록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구나’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끄집어내려 부단히 애를 썼다. 인터뷰에서 들은 예술가의 작은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 작품에 가미된 구간을 찾아내면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마냥 기뻐했다.
업무적으로 읽은 소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A와의 인터뷰에 잔뜩 기대하고 나갔다. A와 나, 출판사 직원 3명이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시작부터 살짝 김이 빠졌다. A와 단 둘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출판사 직원이 동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A의 첫인상도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가 썼던 다소 축축한 분위기의 성장 소설처럼 심각한 그늘이 드리운 표정에 잘 웃지 않는 까칠한 태도를 상상했지만…. A는 천진난만한 인상에 곧잘 웃는 편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니 더 가관이었다. 내 예상은 단계적으로 판판이 깨어졌다. 주로 경험과 작품을 연결지어 묻는 내 질문에 A는 한 문장 이상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어쩐지 뚱하다 느껴진 A의 표정은 ‘기자님, 질문이 좀 이상하시네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인터뷰는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약속한 시간의 절반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준비해간 질문이 고갈되어버렸다. 당초 예정 시간보다 빨리 인터뷰를 끝냈다. 난감한 표정의 출판사 직원을 애써 외면한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가 빈약했던지라 1200자 짜리 인터뷰 기사는 소설 속 문장을 긁어 모아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현명한 기자였다면 평소보다 고된 인터뷰를 끝내고 내게서 문제를 찾으려 했을 텐데…. 당시 너무 어렸던 나는 “A는 분명 대필 작가일거야”라는 음모론에 빠져버리고 만다. 명백한 증거도, 타당한 근거도 없었기에 어디 공개적으로 발표할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난 속으로 정말 그렇게 믿었다. 심지어 지인 몇몇에게는 “아무 증거가 없긴 한데”라 밑밥을 깔고 ‘A는 대필 작가가 틀림 없다’는 음모론을 전파한 적도 있다.
제임스 샤피로의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을 읽는 내내 A를 인터뷰했던 2017년의 내가 떠올랐다. 200년에 걸쳐 벌어졌던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도 편향적이고 왜곡된 개인의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며 위대한 희곡을 탄생시킨 예술가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 받고 있다. 원작자 논쟁에 참전한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토록 훌륭한 걸작은 스트랫퍼드에 사는 별 볼일 없는 ‘그 남자’가 아닌 불세출의 누군가가 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자는 하나만 쓰기도 힘든 걸작들을 홀로 창조해낸 셰익스피어에게 질투를 느꼈고, 다른 이는 학계에 도발적인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도 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대의 학문적 조류의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 논쟁에 뛰어든 사람은 마크 트웨인, 헬렌 켈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델리아 베이컨, 새뮤얼 쇼엔바움…. 결코 배움이 적다거나 지능이 모자란 사람들이 아니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속과는 다른 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재질도 아니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이를 탐구하기로 작정한 이는 제임스 샤피로.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의 저자이자 셰익스피어 문학을 전공한 컬럼비아 대학 영문과 교수다. 원작자 논쟁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보통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다른 누군가가 썼을 거라는 주장에 맞서는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썼을 것으로 보이는 근거를 들며 받아쳤지만 샤피로는 다르게 접근한다. “내 관심사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는 가다.”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무수한 희곡을 제외한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자료(자서전, 주변 인물 증언 등)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원작자 논쟁을 벌인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할 근거를 찾긴 힘들다. 그렇기에 논쟁을 벌인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은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는가. 맥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에 의견을 보탠 사람들은 어떤 시대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이유와 의도로 이런 주장을 펼쳤는지를 놀라우리만큼 참을성 있게 서술한다.
샤피로의 작업은 그야말로 탁월한 저널리즘 저작물이다. 영미권 언론에서 한창 유행했던 ‘팩트 체크’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하다.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이 아주 집요한 가짜 뉴스라는 것을 종합적으로 탐구해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원작자 논쟁'이 시작하게 된 시공간적 배경과 발화자에게 편견을 심어줄 만한 상황적 요소를 모두 살폈다. 이 같은 샤피로의 방식은 어떤 주장을 검증해야 하는 기자들이 지녀야 하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사람들이 던진 주장의 참과 거짓을 논할 때에는 주장 자체에 매몰되기 보다는, 주장한 사람들 즉 발화자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말과 생각도 텅 빈 허공에서 태어날 수 없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개인의 뇌와 가슴과 입, 손을 거쳐서 나온다. 물론, 때로는 주장의 진실을 덮으려는 의도로 메신저를 공격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하지만 의견이나 주장뿐 아니라 메신저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진실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샤피로의 저서에 등장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요즘의 기자들도 종종 범하곤 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마크 트웨인, 헬렌 켈러, 헨리 제임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당대를 풍미했던 지식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셰익스피어의 진위를 의심했다. 예술가가 자전적 경험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상상력과 창의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평범하게 놓인 해석은 건드리지 않고, 이중삼중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을 통해 지적인 희열을 느끼고 위대한 작가로 칭송 받는 셰익스피어를 상대로 이긴 듯한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자들은 사안을 취재할 때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받지만, 애초에 한 사람의 몸을 여과한 팩트는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다. 부정 부패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얻는 벅찬 감정에 가려 진실을 왜곡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기자들의 작업 역시 앞에서 열거한 지식인들이 그랬듯, 무모한 확증편향에 빠져들 수 있다.
돌이켜보니 2017년의 나는, 겪어온 삶의 질곡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훗날 보답이 될 만한 가치 있는 무언가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바람을 예술가의 경험과 퍼포먼스를 연결 짓는 데에 투영한 것이다. 예술가와 작품을 취재하는 기자가 갖지 말아야 하는 편견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집요하게 편견을 입증(?)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당시 게을렀던 나에게 감사한다. 편견은 보통 정체를 숨기고 나타난다. 고로 사실을 다루는 기자들은, 자기 안에서 생겨난 관점을 끝없이 회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애먼 셰익스피어를 사기꾼으로 몰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