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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Feb 17. 2022

'얘기 되는' 논픽션의 조건

<감염도시>, 스티브 존슨

한국의 기자들이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무엇일까. 확신하건대 "얘기된다"일 것이다. 기자라면 누구랄 것 없이 이 말을 매일 입에 달고 사는데, 거칠게 말해 '기사가 될 만한 깜'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렇게 응용된다. "그 식당 전에 가봤는데 얘기 안 되더라." "그 취재원 완전 얘기되던데?" "기사를 얘기되게 좀 써라!" 기자들에겐 식사를 할 식당도, 거기서 술자리를 함께한 취재원도, 그들과 나눈 대화도 모두 '얘기가 되냐, 안 되냐'로 구분될 따름이다.


존 스노 박사(1813-1858)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의사다. 무려 9명의 아이를 낳은 빅토리아 여왕의 출산 마취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실존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기자들에겐 그다지 얘기되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분야도 아닌 콜레라를, 그것도 오염된 물에만 푹 빠져있던 '괴짜'였기 때문이다. 그가 왜 거기에 꽂혔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설령 알았다 해도 그를 인정하진 않았을 테다. "물로 병이 전염된다고?"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의 주장에 콧방귀를 뀌었고, 담론 시장에서 철저히 배척했다. 그가 콜레라와 물의 연관성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뒤인 1849년 9월, <타임스>는 콜레라의 주된 원인으로 토양과 전기, 오존, 부패에 따른 효모만 조명할 뿐이었다.

존 스노 박사

존 스노의 주장은 확실히 '상식 밖'이었다. 정부 정책과도 충돌했다. 1848년 공중보건과 도시 위생에 막 눈을 뜬 영국 중앙보건국은 '공해제거 및 전염병 예방법'(콜레라법)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공해'는 똥무더기의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관료들은 매년 얼마나 많은 양의 '공해'를 템스강에 내다버렸는지를 의기양양하게 발표하곤 했다. 당시 런던은 코를 찌르는 악취로 뒤덮힌 도시였고, 이 악취가 모든 질병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존 스노의 접근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안다. 도시의 모든 오물을 아무런 조치 없이 강으로 흘려보내는 콜레라 법은, 사실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감염도시>(2020)의 저자 스티브 존슨은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미생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당시 과학 수준과 지적 전통으로 보자면 '독기론',  악취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훨씬 과학적이고 얘기가 됐는 것이다.


1840~50년대 영국 콜레라의 원인은 '물'에 있었지만 주류 학계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인간을 보호한 건 후각이었다. 위험을 감지하는데 있어 코는 눈보다 기민했다. 고약하고 불쾌한 냄새는 뇌 안의 경고센터인 편도와 배쪽 섬엽을 강하게 충동질하는데, 이로 인한 즉각적인 혐오감과 구역질이 위험을 빗겨가게 만든 것이다. 즉, 썩거나 배설물로 더럽혀진 음식물, 미생물이 만들어낸 오염된 가스 같은 것들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은 생물학적 보호체계의 발현인 셈이다.


여기에 뿌리를 둔 독기론은 '철옹성'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 게일을 비롯해 구빈법 개혁의 에드윈 채드윅, 찰스 디킨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의학 학술지 <랜싯>의 편집인들까지 하나같이 악취를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몹시 두려워했다. 나이팅 게일이 1857년 발표한 저작 <간호에 관하여>가 소개하는 환자 관리의 제1 철칙은 '환기'였으며, 비슷한 시기 가정과 학교에는 화학자 앵거스 스미스가 고안한 공기 테스트가 널리 권장됐다.


그런데 1849년 8월28일 런던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 그러니까 이 책이 파고드는 주일이 이 단단한 벽에 균열을 다. 브로드가 40번지에 사는 토머스 부부의 6개월 된 아기의 죽음을 시작으로 일주일 동안 콜레라가 도시를 덮쳤다. 전례없는 치명률이었다. 훗날 <옵서버>는 이를 이렇게 보도했다. "월요일 저녁의 브로드 가, 시체를 치우려고 순찰을 도는 영구 마차는 관이 너무 많아 그 안은 물론이고 그 위에까지 무작정 실어야 했다. 런던에서 그 광경은 흑사병 시대 이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령 지도

공교롭게도 이 책의 주인공이자 지역 주민이었던 존 스노는 여전히 물을 의심하고 있었고, 지역 사망자들과 물의 연관성을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우물들을 중심으로 콜레라가 퍼지고 있음을 밝혀낸다. 그렇게 나온 것이 이 책의 원제이자, 과학사에서 비중있게 소개되는 '유령 지도'(The Ghost Map)다. 콜레라 사망자와 상수원을 한데 포개어 시각화한 이 지도는 그 어떤 이론보다 직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틱한 전개와 결과에도 불구하고 반전은 없었다. 존 스노가 넘기에 독기론의 벽은 높았다. 독기론이 밀려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그때 존 스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콜레라의 발병과 확산, 존 스노의 활약과 죽음까지. 이 책을 읽으면 일단 이 모든 사건이 마치 지난주 일처럼 생생하게 재현됐다는 점에서 한 번 놀란다. 아무리 기록이 남아 있었다곤 해도 200년 전 사건을 이렇게 치밀하게 되살린 것은 분명 저자의 역량이다. 책 마지막에 붙은 방대한 참고문헌으로 가늠하건데 취재와 집필에 족히 수년은 걸렸을 것이다. 챕터별로 마지막 문장 부근에 시선을 한껏 끌어모아 여운을 남긴 뒤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는 기교도 놀랍다. 하루 이틀 고민으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일주일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 과학과 역사적 배경을 엮어 스토리를 쌓아올리는 구성은 솔직히 그대로 베껴쓰고 싶어질 정도로 탐이 났다.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든다. 저자는 왜, 200년 전 이 일주일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걸까. 존 스노의 숨은 활약에 대한 후대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 과학저술가로서 과학과 이성의 기념비적 승리를 예찬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을 흥미롭게 재구성하는 논픽션 저술 자체에 흥미를 가져서?


아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저자는 우연히 알게 된 이 사건에서 우리의 '현재'를 건드리는 어떤 지점들을 포착했을 것이다. 200년 전 콜레라를 둘러싼 이 일련의 풍경들은 이 책이 처음 출간된 2008년은 물론, 2022년 현재와 놀랍게 닮아있다. 존 스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건 왜일까? 왜 사람들은 똥무더기를 식수원에 고스란히 흘려보내는 결정을 했던 걸까? 콜레라를 둘러싼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홍수에 마실 물이 없었던 셈데, 언론은 그 통로를 자처해 이를 확산시켰다. 당시 신문들에는 콜레라에 대단히 치명적인 설사제나 아편, 브랜디를 처방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여과없이 실리곤 했다. 가난하니 더럽고 가난하니 병에 걸린다는, 가난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는 사회적 압력들은 이런 주장을 부채질했다.


저자가 주목한 건 '존 스노'로 상징되는 '위대한 이성의 승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이성에 대한 확신이 사회에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왜 저러지' 하며 비웃은 19세기 영국인들은 17세기 영국인들을 더 크게 비웃었을 것이다. 그 당시 흑사병으로 고통받던 영국인들은 고양이를 원흉으로 지목했다가 되레 병을 키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의 선두에 서 있던 '과학국가' 영국의 관료와 지식인, 과학자들은 도시의 오물을 강물에 흘려보내면 강물이 틀림없이 오염될 것을, 그리고 이 물을 상당수 시민들이 식수원으로 삼고 있음을 정말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도시의 악취를 없애는 콜레라법이 런던 보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고, '과학'과 '이성'은 이를 뒷받침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0년 전 런던과 지금 우리는 서로 포개어다. 선거철마다 저마다의 논리 정반대의 해법들이 쏟아지고, 근거 없는 주장과 가짜뉴스가 유튜브를 넘어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넘실다. 지금 이 모습은 후대에 이르러 과연 어떻게 비쳐지게 될까. 저자가 책 마지막에 이르러 도시화의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놓고 제기하는 섬찟한 위기론은, 꼭 코로나19 위기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되돌아보게 다.


스티븐 존슨의 <감염도시>는 내용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얘기되는 논픽션'의 조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적인 가치가 높다. 물론 무엇이 얘기되는 것인지에 관해선 기자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저마다 걸어온 경로와 경험, 기사에 관한 가치관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얘기가 되기 위해선 우리가 맞닥뜨린 현재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듯 하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모두 실화이고, 역사적 장면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무수한 식민지를 거느리며 과학과 이성을 찬란하게 꽃피운 어떤 제국이 아니라, 넘쳐나는 시체를 아무렇게나 꾹꾹 밟아 묻고, 빈민들이 도시의 개똥을 주우러 다니며, 오물을 강물에 무자비하게 흘려보내는 어떤 암울한 도시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성이라는 이름의 주술이 이성을 되레 억누르는, 고약하고 완고한 시대의 정념이 느껴질 지 모르겠다. 논픽션이기에 줄 수 있는 이 생생한 감각은 마치 후각처럼 우리 안의 어떤 경고기관을 충동질하고 위기를 감지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치밀하고 방대한 취재로 시대의 냄새를 되살리는 것, 영리한 구성으로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독자들을 글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그렇게 몰입한 독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한데 포개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 책이 그렇듯 '얘기되는 논픽션'의 조건 아니겠느냐고.


스티브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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