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절정
<미장이> 이명환 글 그림 / 한솔수북
오늘 새벽 남편이 열흘 간의 미국 출장을 떠났다. 말이 좋아 미국 출장이지 비행기 안에서 열네 시간을 앉아 있고, 낯선 도로에서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게다가 여러 업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좋은 소리보다는 싫은 소리들을 들을 게 뻔한 여행이었다.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가기 싫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꾸역꾸역 짐을 챙겨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남편의 뒷모습을 좀 오래 보고 싶었는데, 키가 작은 남편은 이제 막 울창해지려는 나무들 사이로 금방 가려졌다. 마지막까지 보이던 핑크색 캐리어의 바퀴마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시간 5시 50분, 남편은 우리 시간으로 밤 11가 넘어 그곳 공항에 도착한다.
동갑인 남편과는 늘 허물없이 농담하고 유치한 장난도 많이 치지만, 다섯 식구를 어깨에 짊어진 채 출근하는 뒷모습을 볼 때면 저절로 공손한 마음이 되어 고맙고 미안하고 짠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 어쩌다 깨서 깜깜한 새벽에 출근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볼 때도 그랬는데, 아내가 되어 남편의 출근하는 모습을 볼 때도 같은 마음이 든다. 아마도 사냥을 하기 위해 동굴을 나서는 가장의 뒷모습을 보았던 오래전 아내와 아이들의 마음도 이랬으리라. 남겨진 자들의 식량을 구하러 고단함과 두려움을 밟고 어둑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남편과 아버지들의 뒷모습은 슬프고도 감동스럽다.
그림책 <미장이>의 아빠는 타일을 붙이는 '미장이'다. 아빠는 늘 아이가 자고 있는 이른 아침 집을 나서고, 일하느라 한 달이나 집에 못 올 때도 있다. 아이는 아빠가 없는 동안에도 아빠 생각을 한다. 지하철 역의 타일, 빌딩 벽의 타일, 수영장 바닥의 타일, 그리고 아빠가 붙인 집 화장실 타일을 보면서 아빠를 떠올린다. 그동안에도 아빠는 전국 곳곳을 돌며 타일을 붙이고 있을 것이다.
아빠는 타일을 붙이며 외벽을 꾸미고 바닥을 마감한다. 네모 세모 타일을 이어 붙여 작품 같은 벽을 만들기도 하고, 매끈하고 푸른 타일을 깔아 바다 같은 수영장을 만들기도 한다. 아빠가 붙인 색색의 타일들은 도시를 꾸미고 무지개처럼 펼쳐져 세상 곳곳을 찬란하게 한다. 하지만 미장이 아빠의 절정은 따로 있다.
아빠가 부지런히 일을 하면,
우리 식구의 젓가락도 멈출 줄 몰랐다.
찌개와 김치와 나물과 김, 그리고 밥상 가운데 아빠가 일 끝내고 사 온 조기가 있다. 엄마는 밥에 김을 싸서 어린 딸을 먹이고, 아빠는 조기 살을 발라 아들의 숟가락에 얹어 준다. 타일 조각 같이 푸른 밥상을 둘러싼 네 식구의 모습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이다. 식구들이 둘러앉은 밥상. 그것이 타일을 붙이는 아빠의 목적이고 무게이자 절정이었다. 가장의 비애와 행복이 밥상에 같이 있다.
출산 후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나는 '밥벌이'의 무게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살림과 육아, 아이들 교육에 관한 책임감은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굶을 수 있다'는 종류의 극단적인 책임감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그 책임감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다 그러고 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책임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자 무게만 무거워질 뿐이고, 실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일하는 게 남편과 그의 동료들의 삶이리라. 나는 남편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내심 안심하며, '고생이 많다'는 실속 없는 인사만 건넬 따름이다.
요즘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아들은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어릴 때부터 잘 먹었던 아이들인데도 요즘 보면 내 속에서 나온 애들이 아닌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란다. 밥을 다 먹은 남편은 아이들이 두 번, 세 번 밥을 더 퍼서 먹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농담을 한다.
"아, 안 먹어도 배부르다."
"아빠, 밥 다 먹었잖아요."
"말이 그렇다고 짜샤. 너네들 먹는 거 보면 그냥 그런 말이 나와. 아빠는 일 열심히 해야 돼."
남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남편이 느끼는 무게와 보람을 가늠해 보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먹을 것을 위해 일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우리 집만 해도 살림이 빠듯할 때는 먹나 못 먹나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학원을 보내고 빼야 하나를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의 밥상'이란 그 자체로 가장의 무게와 행복을 상징한다. 밥을 먹이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가장 근원적인 일이기에 그만큼 애를 쓸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의 충족감도 준다. 그래서 '밥벌이'란 말이 지금도 그토록 애틋하고 비장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토요일이다. 많은 이들이 쉬는 날이지만, 또 많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일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빠가 일하기도 하고 엄마가 일하기도 할 것이다. 실내에서도 일하고 거리에서도 일할 것이다. 그들이 일을 할 때 건물이 올라가고, 물건이 만들어지고, 돈이 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가족의 밥상에 따뜻한 음식들이 올라올 것이다. 그들 아이들의 입 속으로 그 음식들이 들어가고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열심히 '밥'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들이 오늘도 안전하고 보람되게 일할 수 있길, 출장 간 남편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