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을 노려보고 서서

<나의 구석> 조오 그림책 / 웅진주니어

by 플롯시

책을 펴면 바로 구석이 보인다. 책의 중앙선이 벽의 모서리가 되고, 그 중앙선 1/3 되는 지점에서 삼각형으로 뻗은 두 선이 바닥을 만들어 준다. 세 선이 만나는 꼭짓점, 책을 펼친 이의 시선이 모이는 중심, 그곳이 '구석'이다. 이 책은 구석이 중심인 책이다.


맨 뒷장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공간 안에서 구석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무척 안심이 되고 편안하다고. 하지만 내가 두 번째 장을 펼쳐 그 구석을 바라보는 까마귀를 만났을 때 떠오른 수식어는 '막다른'이었다. 막다른 구석, 더는 갈 곳이 없고 더는 숨을 곳이 없는 지점, 핑계를 대며 달아날 곳이 한 군데도 없는 끝, 그래서 여기서 끝장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비장함이 흐르는 곳, 나에게는 '나의 구석'이 그렇게 다가왔다.


어쩌면 까마귀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냥 좀 심심하고, 지루하고, 약간은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침대와 책장 같은 세간살이를 구석에 끌어다 놓고, 싹이 올라온 화분 하나를 들여놓기도 하며 그곳을 좀 더 다정한 공간으로 꾸며 가고 있는 것인지도. 고작 스탠드 불빛 아래서도 식물은 무럭무럭 자랐지만 까마귀는 더 많은 빛을 주고 싶었나 보다. 벽에 노란빛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마치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듯, 까마귀는 네모나고 동그랗고 길쭉하고 작고 나란하고 아치형인 수많은 노란빛을 그린다.


정성스레 물을 주고, 그만큼 자라 준 식물을 보며 음악에 맞춰 춤도 춰 보지만 까마귀는 뭔가 허전하다. 좀 다른 게, 스탠드 빛이나 벽에 그린 노란빛을 뛰어넘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진짜 햇빛을 들여오기로 한다. 가뿐하게 전기톱으로 벽을 뚫고 창을 내자 진짜 빛이 들어온다. 까마귀와 식물은 이제 살아 있는 빛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바깥세상과 소통하기도 한다.


나에게 그 '구석'이 보다 무겁게 다가온 건 그만큼 조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시선을 붙잡는 화려한 방, 정리하고 청소할 게 수북한 아이들 방, 주방도구들로 복잡한 주방, 얼룩투성이 화장실,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드디어 내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벽 사이, 막다른 구석만 거기 있었다. 드디어 구석과 맞닥뜨렸다. 나는 이제 여기에서 뭐가 되었든 해야 했다. 금방이라도 밤이 올 것 같았다. 그때까지 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에게 구석은 40대 중반인 나이일 수도 있고, 여전히 내가 속한 집구석일 수도 있고, 더 이상 꿈을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한 자각일 수도 있다. 그 구석을 보고 있으면 괴로울 때가 많다. 내 방 하나 번듯하게, 아니 번듯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착실하게 필요한 것만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어서 마주하는 게 괴롭다. 이 나이까지 막막한 마음으로 하얀 벽을 보고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뭔가 괜찮게, 마음에 들게 꾸며 간다 싶어 신이 나다가도 다른 사람의 방에 놀러갔다 오면 내 방이 너무 초라해져 기쁘게 그려서 벽에 붙였던 그림들을 찢어버렸다. 멋지게 꾸미기보다는 금 간 곳에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곰팡이 난 곳을 벅벅 지우느라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려 이것저것 만들어서 놓아두고 붙여 보다가도 너무 진도가 안 나가고 힘만 들어 도중에 포기해 버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다시 빈 벽 앞에 섰다. 벽 사이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까마귀는 키 작은 식물을 바라보다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게 진짜 빛이 아니라도 좋아, 너만 조금 더 잘 자랄 수 있다면. 내가 매일 벽에 그리는 노란색 창문이 헛것이고, 사다리 위에서 팔을 뻗는 내 노력이 헛짓이라도 좋아. 네가 좀 더 클 수도 있잖아,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해 봐야지 내가 한 일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잖아. 일단 나는 그릴 거야. 계속, 계속, 이 벽을 채울 때까지.


식물은 쑥쑥 자랐다. 까마귀가 그린 노란빛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식물 스스로 성실하게 자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까마귀는 노랑으로 가득 찬 벽과 키가 자란 식물을 보면서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만약 식물이 자라지 않았다면 그 부족함은 훨씬 커졌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식물이 자랐냐 자라지 않았냐가 아니라, 노란빛으로 다 채웠냐 채우지 않았냐이다. 까마귀는 노란빛으로 방을 다 채웠기 때문에, 자신이 할 만큼 다 해 봤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는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단한 벽을 깨 버리는 파격적인 시도는 할 것을 다 해 보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까마귀가 벽에 창문을 내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이 더 충만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짜 햇빛을 만나고 친구를 만났으니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여유가 없다. 사실 진짜 창문을 만드는 것조차 내 관심 밖이다. 조급한 나는, 매일매일 빈 벽에 그림을 채워 가는 모습만을 일단 담아두기로 한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그림을 매일 조금씩, 쉬지 않고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노란빛을 그리는 일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글쓰기다. 글쓰기가 내 삶의 궁극적 목표나 구원은 아니더라도 글을 써야 내가 '지금 있는' 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다른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글쓰기가 가장 그렇다.


같은 주제로 동화를 세 번 쓰다가 세 번을 엎었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쓰다가 두 번을 엎고 다시 세 번째 쓰기를 시작했다. 내가 너무 못써서 자괴감이 든다. 늘 계획한 대로 분량을 채우지 못하고 한없이 게으른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 결국은 이도 저도 못 쓰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어둠을 맞게 될까 봐 두렵다. 그래도 나는 이 구석에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주르르 흘려 버린 시간을 돌아보고 막막한 앞날을 바라보면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무엇 하나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살고 있지 않다. 그저 현재에 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오늘도 내일도 까마귀처럼 글을 쓰면서 빈 벽을 채워가고 싶다. 작은 화분에서 싹이 틀지도 모른다는 소망도 일단은 접어두기로 한다. 나는 그저 매일 '나의 구석'을 노려봐야겠다. 그 막다른 구석이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쓸쓸함이 우리 셋을 감쌌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