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후 May 11. 2020

산 세바스티안을 아시나요?

스페인의 바닷마을

내가 스페인에 돌아온 목적은 세 가지였다.

마드리드, 산티아고 순례길, 그리고 바다.

산 세바스티안은 스페인에서 살았던 스물세 살 때부터 가고 싶었던 바닷마을이다. 보통은 미식의 마을로 유명하지만, 나는 오로지 바다 라꼰차를 보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한다.


3주 간의 마드리드 생활을 잠시 접고 오랜만에 여행길을 나섰다. 마드리드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고작 바다 하나 때문에 떠나기로 했다니. 변화가 주는 불안정성과 이동의 귀찮음이 몰려온다. 짐을 한 움큼 짊어지고 이동해야 하는 건 여행의 유일한 번거로움이지만, 떠냐야만 도착하기에. 나는 또 다른 삶을 만나기 위해 기찻길에 올랐다.


미리 보는 산 세바스티안의 첫 모습


이른 새벽 차마르틴 기차역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올 계획이었기에 배낭에 필요한 짐만 챙기고, 기내용 캐리어는 역 내 수화물 보관소에 맡긴다. 캐리어가 없으니 몸이 한결 자유롭다. 두 손에 쥐이는 것 없이 배낭 하나만 멘 상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모양새다. 간단하게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으며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로 가는 순간은 지루하지 않다. 비행기처럼 수속을 밟는 절차가 번거롭지도, 버스처럼 덜컹이지도 않는 기차는 나에게 최적의 교통수단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대도 기차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을 정도니까. '얼마나 빠른지'가 중요하지 않은 때도 있다. 창 밖의 풍경을 보며 글을 쓰고 책을 읽다 보면, 기차는 적당한 속도로 목적지에 다다른다.


산 세바스티안 역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독특한 건물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난 분명 바다를 보러 온 건데 거리가 왜 이렇게 멋있는 건지. 하지만 하루 종일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해 몹시 배가 고팠다. 음식점을 찾을 여력도 없을 때 나는 케밥집에 가곤 한다. 포장한 케밥을 들고 드디어 바다를 만나러 간다.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단지 바다 하나 때문에 온 마을인데, 그 바다 하나가 기가 막혔다. 마을을 둘러싸듯 둥근 해변과 곱게 부서지는 모래, 맑다 못해 투명한 물, 적당히 경쾌한 파도 소리. 누군가 아름다웠던 바다를 물어보면 포르투갈의 코스타노바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꼽곤 했다. 이제는 더 자신 있게 말한다. 나에게 최고는 스페인의 산 세바스티안이라고!



바닷마을에서 보내는 며칠.

바다 앞에만 서면 나는 한없이 늘어진다. 혼자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배가 고프면 해변에 앉아 밥을 먹는다. 수건 하나 깔고 모래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낮잠에 빠진다. 나의 바다 여행을 돌이켜보면 해변에서 늘어지게 잔 기억이 많다. 평소에 잠을 푹 자지 못하는 내가 바다만 가면 왜 그렇게 잤는지 의문이기도 하다. 따뜻한 햇살과 모래, 귀를 간지럽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는 잠은 어떤 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이때만큼은 경직된 몸을 자연에 푹 놓아 버린다. 바다에서는 한없이 늘어지는 것, 내가 바다를 느끼는 방식이다.



아침부터 일몰까지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빠를 떠올리며 짧은 편지를 썼다. 감동적인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오 년 전 떠났던 아빠와의 여행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나이 스무 살에, 둘에겐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던 자유여행을, 넓디넓은 유럽으로 떠났던 여행이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용기고 그만큼 그 시간들은 내게 애틋하게 남아있다. 폭우로 기차가 연착되어 역에서 하염없이 노숙을 했던 적도, 히치하이킹을 해서 다른 마을로 넘어간 적도, 비행기를 놓쳤던 적도 있었지만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아빠와 함께여서 가능한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진 '완벽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계획이 없던 여행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런 여행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서투름'이 남긴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인가 나의 모든 여행의 중심에는 아빠가 있다. 여전히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며 나는 아빠를 떠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한 일상이 여행이 된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