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페인에 돌아온 이유는 마드리드에서 최대한 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일주일 정도 순례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지만, 준비는 거의 하지 않았다. 발에 바를 바셀린만 따로 사고, 나머지는 가지고 있던 생필품으로 배낭을 채웠다. 당연히 신발도 평소에 신던 그대로, 스니커즈를 챙겼다.
드디어 순례길의 첫날이 밝았다.
비수기인 오 월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적당히 없어서 걷기에 좋았다. 한 시간쯤 걷다 드넓은 평야 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전날 사둔 납작 복숭아와 마들렌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다시 길을 나서고부턴 오르막이 쭉 이어졌지만, 그땐 그게 힘든 줄도 모르고 묵묵히 올랐다. 살면서 운동이라곤 여행할 때 걷는 며칠이 전부였던 내가 몇 시간의 오르막을 쉬지도 않고 걸었다니, 역시 시작의 패기는 돌아보면 새삼 대단하다.
푸르른 오월의 순례길
한국에서도 많이 걸었다 싶으면 고작 8km 정도가 다였는데, 아무 준비 없이 100km 넘게도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일이 닥치고 보니 내가 생각보다 잘 걷는 사람이어서 놀랐다. 흘러가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지루할 틈 없이 걸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곧, 내가 살아가는 삶이었다. 내 삶에 놓인 나를 처음 눈으로 마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정도 적응하며 걷고 있을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위해 떠나온 사람들은 온몸과 배낭까지 감싸는 큰 우비를 챙겨 온다고 한다. 하지만 순례길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나에겐 상체만 덮는 길이의 우비가 전부였다. 급한 대로 배낭과 머리 정도만 작은 우비로 감싸고 식당을 찾아 걸었다. 정작 필요할 땐 작은 상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없는 빗 속을 5km 정도 걷고 나서야 식당을 찾아 쉴 수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보니 발이 신발 앞 쪽으로 자꾸 쏠리게 된다. 딱딱한 신발 속의 발톱이 자꾸만 새끼발가락을 찔렀다. '이러다 발이 다쳐서 시작과 동시에 못 걸으면 어떡하지.' 잠시 스친 생각에도 좌절스러웠다. 혹여나 다쳐서 못 걷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내가 나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감정이 일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포기한대도, 이번마저 해내지 못하면 내가 더 이상 나를 믿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시기의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무조건 걸었다.
멀리 보이는 포트토마린 마을
포르토마린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먹구름이 새하얀 뭉게구름으로 바뀌어 갔다.
저 멀리 마을로 향하는 길이 양갈래로 나뉘었다. 왼쪽 길은 거리가 조금 멀지만 경사가 완만했고, 오른쪽 길은 조금 가깝지만 경사가 가파른 길이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숙소에서 쉬고 싶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는 왼쪽 길을 두고 나는 오른쪽 내리막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또한 내리막 길의 위험성을 몰랐기에 한 무모한 선택이었다. 큰 배낭을 메고 밑창이 얇은 스니커즈를 신고, 가파른 내리막을 걷는다는 것은 무릎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모든 무게가 발바닥과 무릎의 고통으로 전해졌다. 왼쪽 길로 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와버렸다. 여기서도 할 수 있는 건, 그저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뿐.
체육관이 문을 닫은 요즘엔 아빠와 마스크를 끼고 등산에 간다. 이때마다 스니커즈를 신고 순례길을 걸었던 지난날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였는지 새삼 느끼곤 한다. 곧잘 삐었던 발목과 매일 피가 났던 발톱, 무릎에서부터 전해지는 허리의 통증, 이 정도로 아플 줄 알았으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니커즈도, 우비도, 순례길에 최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한 일이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부딪혀본 일이든 결과는 항상 같지 않다. 상황도 내 뜻대로 풀릴 리가 만무하다. 모든 일에 계획부터 세우던 내가, 처음으로 무모하게 나를 믿은 순간이었다. 준비야 어찌 됐든 부딪혀볼 만했다. 어차피 완벽한 준비란 건 없으니까.
비올 때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돌아보면 스무 살 이래로 나는 이렇다 할 결과를 가진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성적을 얼마큼 올려야 한다,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와 목표가 있었다.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단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졸업하자는 것이 나의 모토였다.그렇게 시작한 첫 도전은 연극이었다. 2년 동안 연극을 올리면서 배우로 무대에 서고, 세 작품의 연출을 맡을 기회를 얻었다. 스물한 살 때는 수업도 들으면서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스페인 교환학생을 갔고, 그곳에서 전공도 아닌 스페인어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화 편집 감독님의 교양 수업을 듣고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 후로 다양한 영화 동아리 기획도 하고, 직접 단편영화까지 제작했다.
당연히 취업에 도움되는 스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자격증 취득, 인턴 경험, 공모전 등이 아니었으니, 돌아보면 남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기 싫었다. 후회하지 않지만, 왠지 후회한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것은 사회가 원한 인재가 아닐 테니까. 결국은 취업을 위한 것이 아닐 테니까.
마냥 긍정의 마음으로 순례길을 떠나온 건 아니었다. 이런 고민의 끝에 나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순례길에 온 것 또한 내가 나를 극한으로 몰아세우고, 나의 한심함을 자각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나를 꾸짖고 싶었던 거다. 평범하게 살기까지 얼마나 숱한 노력이 필요한지는 망각한 채. 이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아쉬움만 보았다. 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
순례길의 끝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이것 또한 아무 결과도 남지 않는 경험이진 않을까.
긍정과 부정을 오가며, 나의 순례길의 첫날이 저물었다.
참고로 나의 순례길은 사리아에서 시작한 120km의 마지막 코스다. 따라서 혹자가 말하는 '완벽한' 순례길 이야기는 아닐 터다. '정석대로 걸었나, 얼마나 오래 걸었나'를 떠나 나는 나의 길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