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P는 정신없이 흘러간 근황을 이야기했다. 몸은 힘들지만 원하는 곳에 들어가서 다행이라며.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P의 직장 생활로 이어졌다. 첫 직장에 적응하느라 온갖 집중이 그곳에 가있는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었다. 서툴고도 절실한 이들의 모습. 앞으로 혼날 일만 남은 것 같아 걱정이라며 P는우울해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진 마.” P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나는 말했다.
P는 답한다. “너는 몰라.”
'직장생활에 대해 말해도 경험한 적 없는 너는 모르겠지.' P의 적대적인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거라 여기면서 왜 나에게 이야기를 한 거지, 순간 원망이 일었다. 잠깐의 침묵 후, 우리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어색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직접 겪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대화를 한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얻는 공감도 있지만, 무관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얻는 뜻밖의 위로도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살지만, 비슷한 감정을 수없이 겪어내며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예상치 못한 사람과 인연에서 얻는 공감과 사랑도 분명 존재했다. 실컷 이야기한 끝에 돌아오는 ‘너는 모른다’는 한마디는 모든 진을 빼어버리기에 충분했다.
해가 지날수록 친구 사이의 생활 반경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학창 시절과는 확연히 달랐다. 때때로 달라진 관심사와 일상을 보며 거리감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경우 두 가지의 선택지가 남는다.
첫 번째,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두 번째, 서로의 변화를 인정하고 또 다른 공통점을 일궈나가는 것이다. 친구의 일방적인 대화, 아무리 말해도 너는 모를 거라는 태도는 그를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애정을 뚝 꺾었다.
취준생인 나는 직장생활에 대해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기를 견디는 취준생의 생활도, 암담했던 공무원 수험생의 생활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텐데. 나의 힘든 하루하루와 견뎌냄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던 것은 ‘어차피 말해도 너는 몰라’의 마음이 아닌 ‘너도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않았니’라는 공감에 가까웠다.
나의 힘듦을 너는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조금의 좌절감이 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삶에 관한 가치관과 많은 생각을 공유했던 것 같은데, 불과 며칠 사이에 이렇게도 멀어져 버린다.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우리의 거리는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당사자의 아픔은 당연하게도, 그 상황에 처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건 ‘아무리 말해도 너는 알지 못할 거야’라는 적대감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응원할 수 있어’라는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같고도 참 다르다.
우리는 서로를 쉽게 동기화하고 배척한다.
더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지금 나의 마음이 넓지 못해서 그 말이 생채기로 남은 걸까.
사소한 말의 무게가 꽤 오랫동안 마음에 가라앉아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끝없이 좁아지는 마음은 스스로가 이겨내야 할 과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