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와 관련된 영화를 떠올려보면,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가 주는 이미지가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내가 어릴 때는 복도식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가 여름마다 쏟아졌고, 학생이 되었을 때쯤엔 아파트 주민 간의 단절을 다룬 강풀 작가의 <이웃사람>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최근에는 아파트를 하나의 성채처럼 구현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개봉했다. 공통점은, 아파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안락한 주거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단절과 그 단절에서 오는 공백에 대한 두려움이 형상화된 공간에 가까웠다.
특히, 일련의 작품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바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는, 열린 문틈 사이로 바깥 공간을 훔쳐보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순간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리는 장면이다. 물론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자는 건 결단코 아니다. 어찌 됐건 간에 나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체불명의 존재든, 살인마든, 외부인이든. 그 어느 것에 대항해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 나의 안전과 목숨과 재산 그리고 삶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주택’에 익숙한 세대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돌 깔린 골목에 위치한 1층짜리 주택이었는데 자연스레 담장 너머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있었으며, 점심을 먹고 난 뒤면 친구 집 대문을 두드리며 놀 사람을 찾았다. 내 키의 반쯤 되는 네 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맞은편에 살던 아주머니가 연고를 발라주곤 했다. 나의 ‘집’과 함께 주택‘가’라는, ‘골목’이라는 공동 공간에서 지내던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자연스레 체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파트는 어떠한가. 방음이 잘 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정말로 내 공간이다. 벽간, 층간 소음은 내 공간을 침해하는 일종의 공격이다(물론 나도 공동 건물에 사는 입장에서, 이웃 간의 소음은 정말로 성가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단절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무관심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인다. 오로지 나만이 안전한 공간에 익숙해진 탓에, 여러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응당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궁금해진다. LH 청년 주택에 살든, 서울숲 트리마제에 살든. 우리는 입주민 전에 시민일 텐데. 그러나 종종 나조차도 그 사실을 잊곤 한다.